주택난 속 조선 한양 세입자 설움, 현대 서민들과 닮았다

서울역사편찬원 ‘코로나시대, 다시 집을 생각하다’ 출간…조선시대 주택 매매와 세입 실태 소개

등록 : 2021-03-04 15:33 수정 : 2021-03-0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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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신청자 모두에 토지 나눠줘

다만 신분에 따른 토지 분배량은 달라

시간 지날수록 한양 집값 상승세 보여

지방 1천냥, 서울 2만냥에 집 거래돼


후기엔 유입인구 늘면서 주택난 심화

양반들 ‘여염집 강탈’ 탓 상황 더욱 심각

영조, 과거 합격 취소 등 강력 조처 펴자


이번엔 ‘실수요자 거주지 마련’ 어려움

‘조선시대 한양 거주 무주택자의 서러움 또한 현대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서울역사편찬원(원장 이상배)이 최근 펴낸 <코로나시대, 다시 집을 생각하다>에서는 조선시대 한양의 집 없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시대…>는 조선시대 집과 관련해 양반들의 집 꾸미기에서 이루어지는 사교 생활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지만, 그중에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조선시대 한양 지역 주택 거래와 세입자 문제 등을 다룬 제2장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의 집 소유하기·구하기’다. 오늘날 서울의 집값 인상, 전세난, 셋방살이의 서러움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적잖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유승희 연세대학교 법학연구원 연구교수가 집필한 이 장은 우선 조선 건국 초기 한양의 주택 상황부터 다룬다. 유 교수는 조선 건국 초기에는 “정부가 집짓기를 신청하는 한양 사람들에게 집터를 나누어주었다”고 설명한다. 지금의 서울시에 해당하는 한성부가 “신청인의 신청을 받아 빈 땅이나 만 2년이 되도록 가옥을 건축하지 않은 대지를 떼어서 사람들에게 지급해주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순조의 장인이며 안동김씨 세도가인 김조순(1765~1832)의 별서(별채)를 그린 옥호정도. 당시 한양 세도가들의 풍족한 생활을 보여준다.

물론 대군이나 공주는 일반인인 ‘서인’에 비해 15배나 많은 땅을 받는 등 신분에 따른 차등 지급이었다. 이런 차이는 있었지만, 서민들에게까지 토지 분급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한양 거주자 수에 비해 집 지을 땅이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정치·경제·국방 등에서 한양의 중심적 역할이 높아지자 한양에서 살고자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유 교수는 한양 거주 희망자 증가와 관련해 주원인으로 “관직에 제수돼 상경한 지방 사대부, 관직을 구하거나 과거를 위해 올라온 유학, 승호군 등으로 차출된 5군영의 군병 등 관료군,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한 이농인의 존재” 등을 제시했다.

이렇게 한양 거주 희망자가 늘어나면서 한양에서는 가쾌(家儈) 혹은 집주릅이라 불리는 주택매매알선업자도 생기고, 집값도 뛰었다. 조선 후기 집값은 “지방의 경우 1천냥이 넘는 집이 아주 드문 반면, 한양에서는 가장 비싼 집이 2만냥에 거래될 정도였다”고 한다. 한양 집값이 올라가자 지방에서 올라온 군병 등은 한성부에서 주택을 마련하지 못한채 관사나 남의 집 빈터, 양반집 행랑을 빌려 임시로 거처했다고 한다.

1976년 가회동 한옥의 모습. 1920년대 서울 주거 인구가 증가하면서 집 장사를 위한 한옥 신축이 크게 늘어났다.

또한 현재의 임대료에 해당하는 가대세(家垈稅) 등 집세도 높아져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에게는 큰 부담이 됐다. “한양의 경우 지방과 달리 곡식, 땔감 등 모든 것을 사서 써야만했기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온 군병의 월급으로는 생활비는 물론 가대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한곳에 정착할 때쯤 되면 뜻하지 않게 이사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대’ 즉 빌린 집이 팔려서 주인이 바뀌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유 교수는 “조선시대에도 주인이 바뀌면서 새로운 가대주가 원래 있던 가대의 세입자들을 내쫓고 그곳에 집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양반가 주택은 주거뿐만 아니라 사교 모임으로도 자주 이용됐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가면 지방에서 올라온 양반의 경우 집이 없어 단신으로 셋방살이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의 한양살이를 더욱 어렵게 한 것은 각종 금지령이었다. 정조는 훈련도감의 군병이 다른 사람의 행랑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이유는 양반의 행랑에 거주했던 훈련도감 군병이 그 집 안주인과 간통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행랑 거주 금지가 군병에게 큰 타격이 됐다면 영조 대에 가장 강하게 적용됐던 ‘여가차입(閭家借入) 금령’은 지방 출신 사대부들에게도 큰 어려움을 주었다.

여가차입 금령은 여염집(여가)을 빌려 들어가지(차입)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금령이 만들어진 데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횡포가 크게 작용했다. 당시 양반들이 피접(避接)을 이유로 ‘여가차입’ 형식으로 집을 빌린 뒤, 결국에는 그 집을 빼앗아버리는 ‘여가탈입’(閭家奪入)이 판쳤기 때문이다.

피접이란 병들어 앓는 사람이 자기가 살던 집을 피해 다른 곳에서 요양하는 것을 말한다. 피접을 명목으로 여염집에 잠시 거주하기로 했던 양반 중 상당수가 결국에는 자신의권력을 이용해 그 집을 강탈해버리는 것이다.

유 교수는 “상전이 피접 때문에 자기 노비의 집이나 속량되어(노비의 신분에서 풀려남) 양인이 된 옛 노비의 집에 들어간 뒤 옛 노비 등을 쫓아내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들은 불법 여부를 조사하러 온 관리를 때리는 등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1401년(태종 1년) 왕위에서 물러나 태상왕으로 있던 태조 이성계가 후궁에게서 얻은 딸 숙신옹주에게 가옥과 토지를 내려주는 문서인 ‘숙신옹주가대사급성문’. 동부 향방동에 있는 재신 허금의 집터와 그 석재를 사들이고, 재목은 노비를 시켜 잘라내 사용하라고 적었다.

이에 조선 후기에는 벼슬아치가 여염집을 빼앗은 것이 드러나면 장 100대를 치고 3년 징역을 살도록 했다. 파직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금령이 영조 대에는 더 강화돼 불법이 드러나면 대과나 소과의 과거 합격도 취소하고, 선비는 6년간 과거 응시를 못하도록 했다. 각종 금령에도 ‘여가탈입’이 수그러들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로 보인다.

영조 어진. 조선 후기 양반들이 불법적으로 서민들의 집을 빼앗는 사례가 많자 영조는 양반의 이런 행위를 강력히 처벌했다.

하지만 이런 양반들의 횡포로 인한 규제 강화는 실수요자인 지방 출신들에게는 한양살이의 어려움을 가중하는 요인이 됐다. 이들은 실수요자였고 여염집을 강탈할 권력도 없었지만, 정부의 금령 탓에 ‘탈입’으로 오인돼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따라 이들 중에는 민가를 빌려서 거주하지 않고 산 밑에 막사를 짓고 생활하는 이도 있었고, 도성 밖 강변에서 초가를 얻어 사는데도 양반이라는 이유로 ‘여가탈입’ 대상이 돼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례도 일어났다고 한다. 현재 다주택자들이 집값을 잔뜩 올린 탓에 실수요자가 피해를 보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이렇게 지방에서 온 관직자 가운데 거주 불안으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수 생기자, 영조는 단신으로 상경한 지방 관직자 등에 대해서는 ‘여가탈입’의 예에서 제외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각종 규제와 완화가 반복되는 모습이 현재 상황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현재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주택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국정 현안이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집에서 이루어졌던 사교모임을 그린 김홍도의 .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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