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강남 빌딩 숲도 800년 느티나무 풍취보다 높진 않았다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⑲ 강남의 오래된 나무와 숲길

등록 : 2021-02-25 14:45 수정 : 2021-04-1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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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의 이야기 간직한 오랜 나무들

도심 곳곳에서 꿋꿋이 옛이야기 전해

달터공원에서 대보름 활기 떠올리고

선정릉 소나무숲에서 ‘오아시스’ 경험

800년 가까이 살고 있는 강남구 도곡동 느티나무.

정월 대보름의 추억이 떠오른 건 강남구 도곡동과 구룡산을 잇는 숲길에 만들어진, 대보름 달맞이 놀이터라는 의미의 ‘달터공원’ 덕이었다. 강남구 빌딩 숲 이면에서 수백 년 전 이야기를 간직한 채 살아남은 나무들이 고맙다. 강남구 남쪽을 지키는 대모산, 구룡산, 국수봉도 선릉역 주변 빌딩에 에워싸인 선정릉도 도시에 푸른 기운을 불어넣는 오아시스다.

달터근린공원 숲길은 구룡산과 강남구 도곡동을 잇는다.

강남구 도곡동과 구룡산을 잇는 숲길 달맞이 놀이터


설보다 놀 게 더 많은 날이 정월 대보름이었다. 대보름 전날인 14일 점심에 온 가족이 모여 아홉 가지 나물을 무치고 오곡밥을 해 먹었다. 저녁에는 팥시루떡을 해서 대청, 방, 부엌, 장독대, 변소에 놓고 한 해 액을 막고 복을 기원했다. 이웃집에 팥시루떡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집마다 여러 집 떡이 모였다.

정월 대보름날은 아침에 부럼을 깼다. 종기나 부스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작은 기원이었다. 겉껍데기를 까지 않은 밤이나 땅콩을 깨물어 소리를 냈다. 어떤 집은 사탕을 깨물기도 했다. 어른들은 ‘귀밝이술’을 한 잔 마셨다. 낮부터 윷놀이, 연날리기, 널뛰기를 했다. 밤이 되면 냇가에 모여 긴 철사로 묶은 깡통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불에 잘 타는 것들을 채운 뒤 불을 붙여 휘휘 돌리며 쥐불놀이를 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뜨면 어른들은 달맞이하며 소원을 빌기도 했다. 논에 땔감을 모아 불을 지피고 활활 태우는 게 공식적인 마지막 행사였다. 하지만 더 놀고 싶은 아이들은 밝은 달빛 아래 숨바꼭질을 했다. 그렇게 밤이 깊을 때까지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옛날 정월 대보름 때 놀던 추억을 떠오르게 한 건 강남구에 있는 ‘달터공원’이라는 이름의 숲길이었다.

강남구 개포동 개포지구대 앞길 건너편에 숲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올라 숲길을 걷는다. 삐쭉 솟은 아파트 단지 건물과 주택가 사이에 숲이 있는 것이다. 그 숲에 달터근린공원을 만들었다. 숲길 한쪽에 ‘강남구-트리플래닛 도시 숲 프로젝트’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룹 신화의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신화의 팬클럽인 신화창조의 모금으로 숲이 조성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숲 이름도 정감 어린 ‘달터’공원이다. 대보름 달맞이 놀이터라는 뜻이란다. 정월 대보름 쟁반같이 둥근 달은 아니지만 파란 하늘에 낮달이 떴다.

촘촘한 나뭇가지 사이로 아파트 단지 높은 건물이 보인다. 구룡산 정상 이정표 쪽으로 걷는다. 계단이 놓인 굴곡진 비탈길을 지나면 야외학습장이 나온다. 나무들이 빼곡하게 둘러싼 공간이 아늑하다. 나무로 만든 탁자와 의자에 앉아 마음 편히 재잘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책도 읽으며 노는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개포 지하차도와 이어지는 도로 가운데 있는 530년 넘은 향나무.

강남 빌딩 숲에 남아 있는 오래된 나무들

용오름 다리를 지나면 길은 본격적으로 구룡산으로 접어든다. 용오름 다리를 건너지 않고 도로로 내려선다. 구룡산 터널 교차로 쪽으로 걷는다. 교차로가 나오면 왼쪽으로 돌아 걷는다. 개포 지하차도로 이어지는 도로 가운데 푸른 나무가 눈에 띈다. 보호수로 지정된 530년 넘은 향나무다. 향나무 부근 인도 한쪽에 300년 정도 된 회화나무도 한 그루 있다.

도곡근린공원 숲 언저리 아파트 단지 한쪽에 80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느티나무가 있다. 그 나무에 효심 깊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에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김아무개라는 사람이 있었다. 오랫동안 어떤 약을 써도 아버지 병이 낫지 않았다. 용하다는 비법을 수소문하던 중 그는 아버지의 병에는 인육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둔부로 약을 지어 아버지께 드렸더니 병세가 회복됐다는 이야기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3년 동안 아버지 산소를 모시며 살았다고 한다. 옛것이 다 사라진 그곳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남아 효자 김아무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느티나무 아래 빈터를 잿마당이라 했다.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였다. 매년 그곳에서 잿마당제를 지냈다.

대치동에는 600년 가까이 사는 은행나무가 있다. 그곳의 옛 지명이 한티(한터)마을이다. 예전에 큰 고개가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티’는 큰 고개를 말하며, 한자로 바꾸면 ‘대치’가 된다. 현재 대치동이란 이름의 유래가 된 옛 마을 이야기다. 옛 마을의 흔적이 다 사라진 곳에 남아 있는 은행나무 고목을 찾았다. 대치동 빌딩 숲 이면도로 전선이 어지럽게 널린 곳에 은행나무 고목이 있다. 이 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洞神)으로,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7월 초하루에 마을의 안녕과 사람들의 행복을 빌며 제를 올렸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은행나무 앞에 영산단 기념비를 세웠다.

강남구 일원동에도 300년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나무가 있는 곳 이름이 느티나무 공원이다. 느티나무 공원을 뒤로하고 광평로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넌다. 상록수 아파트와 한솔마을 아파트 사이로 걷는다. 대모산 등산로 입구 중 한 곳이다. 아파트 단지 주택가 뒤에 한솔근린공원, 대모산 숲속 야생화원, 대모산 도시자연공원, 대모산 유아 숲 체험장 등 자연과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아직은 초록 풀과 꽃들이 없지만 가족끼리 나와 숲에서 논다.

대모산 헬기장에서 본 잠실종합운동장.

강남구의 오아시스

대모산, 구룡산, 국수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체감 온도 영하 18도를 찍던 날 걸었다. 전날 내린 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산길을 걸어야 했다. 이 길은 강남구와 서초구의 경계이자 강남구 가장 남쪽에 있는 자연의 보루를 걷는 길이다.

수서역 6번 출구에서 대모산으로 접어들었다. 궁마을과 쟁골마을 이정표가 보인다. 궁마을은 지금의 수서동 400~500번지 일대를 말한다. 세종 임금의 손자인 영순군의 무덤을 대모산 기슭에 두면서 궁마을의 역사는 시작된다.

산허리에 난 길을 따라 걷다가 대모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이정표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산비탈에 앙상한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 사이로 계단 길이 한 줄기 났다. 그 풍경이 이곳을 다시 찾게 했다. 대모산 정상을 지나 헬기장에 도착하면서 시야가 트인다. 잠실종합운동장이 한강으로 진수하려는 배의 모습이다. 높이 306m의 구룡산 정상도 전망 좋은 곳이다. 눈 쌓인 구룡산 정상을 지나 도착한 국수봉은 대모산, 구룡산, 국수봉 능선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 동쪽으로 강동구와 경기도 땅, 서쪽으로 김포 너머까지 시야가 트인다. 통쾌하다. 가슴이 뻥 뚫린다. 눈 쌓인 길을 조심스레 내려왔다. 헌인릉(태종 임금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인 헌릉과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무덤인 인릉)이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다음에 들르기로 했다. 왕릉 숲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고 차분하게 해준다.

선릉역 주변 빌딩에 둘러싸인 녹색지대인 선정릉을 찾은 날은 한낮 온도가 영상 17도를 기록했다. 며칠 사이에 30도가 넘는 온도 차를 온몸으로 느꼈다. 선정릉은 성종 임금과 그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윤씨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을 일컫는다. 능을 에워싼 소나무 숲이 좋다. 숲에 깃든 임금의 무덤 덕에 수백 년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발길 닿는 곳 어디나 마음이 편안하다. 도심의 왕릉 숲은 녹색 오아시스다.

소나무에 둘러싸인 성종 임금의 능(선릉).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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