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우리’

“한국과 터키는 형제다”…대륙 끝 청년 바투르의 믿음의 증거

길 위에서 만난 ‘우리’ ① 터키 안탈리아에서 만난 청년 ‘이브라힘 바투르’

등록 : 2020-12-24 16:03 수정 : 2021-04-1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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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부터 해마다 해외로 나가

‘나와 우리’ 크고 작은 흔적 찾아 여행

2016년 터키에서 만난 청년 바투르

‘울란바토르’ 닮은 자신의 성에 자긍심


실제 ‘영웅’이라는 뜻 나타내는 바토르

몽골-투르크 계통에서 많이 나타나

그러나 헝가리어나 만주어에도 등장


몇 개 언어로 속단하기는 어려워


하지만 ‘형제국 한국’ 향한 그의 호감은

그의 눈빛조차 따뜻하게 느껴지게 해

터키가 위치한 아나톨리아 반도는 그리스, 페르시아, 오스만 튀르크 등 다양한 세력이 나라를 세운 곳이다. 이에 따라 현재 터키에도 다양한 문화의 흔적이 많다. 모스크 벽면을 뒤덮은 푸른빛 도자기 타일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2016년 겨울 터키에서 테러가 속출하고 위험하다는 말은 많았지만 오랫동안 준비해온 여행을 포기할 순 없었다. 이스탄불에서 이슬람 사원 자미(모스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터키 여행은 인상이 깊었다. 이스탄불에서 1박을 하고 앙카라로 출발하려던 날, 앙카라에서 총격 사건이 있었다. 한 터키 경찰이 비번인 날에 러시아 대사를 저격했다. 결국 앙카라행 비행기를 취소하고 지중해 연안의 남부 도시 안탈리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안탈리아는 지중해 남부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중세의 거리가 남아 있어 산책하기도 좋아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묵은 바쿠스라는 이름의 작은 호텔에 손님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한겨울이라 해안가에 놀러 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은 호텔에는 사장도 보이지 않고 30대 중반의 터키 청년 지배인 한 명이 우리와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숙박 일수는 2박3일로 짧았지만,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준 그와 나눈 대화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식사 시간에도 우리를 챙겨주는 이 청년 지배인은 자신을 ‘이브라힘 바투르’라고 했다. 우리는 그와 친하게 지내려고 ‘이브라힘’이라는 이름을 외우기 위해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이브라힘’은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슬람식 발음이다.

이브라힘 바투르는 내가 “이브라힘”이라고 부르면 꼭 “바투르”라며 자신의 성을 상기시켰다. 알고 보니, 자신의 성에 대한 자긍심 때문이었다. “당신의 성씨가 바투르라는건 알겠는데 왜 꼭 이름과 성을 다 불러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혹시 몽골의 수도를 아느냐”고 이 터키 청년이 나에게 되물었다.

“울란바토르.”

난 몽골의 수도 이름을 얘기하면서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어, 몽골의 수도와 당신 성의 발음이 같네?”

이브라힘 바투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받았다.

“바로 그겁니다!!”

그는 자신의 바투르라는 성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를 매개로 몽골과 터키의 역사 이야기를 쏟아냈다.

“터키와 한민족은 형제”라고 늘 강조했던 터키 청년 이브라힘 바투르(왼쪽)와 필자.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붉은 바토르/바투르’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 수흐 바타르라는 독립 영웅의 이름을 따서 원래 ‘후레’였던 이름을 울란바토르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성 바투르가 몽골의 성 바토르와 같은 것은 몽골과 터키의 혈연적 관계를 보여주는 산 증거라고 얘기했다.

그의 주장은 신선했다. 실제로 ‘영웅’을 뜻하는 ‘바투르’는 몽골-투르크 계열 언어에서 많이 나타난다. 실제로 터키는 몽골 쪽에 자리잡은 돌궐족 중 서쪽으로 이동해 나라를 세운 서돌궐(583~659년)과 관련이 깊다. 서돌궐은 이후 셀주크-오스만 튀르크로 이어져 현재의 터키가 된다.

하지만 언어들의 발음만으로 볼 때 그의 주장에는 풀어야 할 대목도 적지 않다. ‘바토르’ 혹은 그와 비슷한 발음의 단어들이 몽골과 터키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만주어, 불가리아 등 많은 나라 언어에서도 영웅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가령 헝가리어의 바토르(Bátor, 용감하다는 뜻), 페르시아어의 바하도르(Bahador), 그루지야어의 바가투르(Bagatur), 힌두스탄어의 바하두르(Bahadur), 만주어의 바투루(ᠪᠠᡨᡠᡵᡠ baturu), 타타르어 및 카자크어, 우즈베크어의 바티르(Батыр) 등등….

몽골·터키의 바투르와 달리 이들은 칭기즈칸의 세계 대원정 때문에 이렇게 전파된 것일까? 몽골은 ‘몽올 실위’에 그 기원을 둔다. 여기서 ‘몽올’이라는 말은 용감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몽골은 여러 실위족 중에서 가장 용감한 실위족이라는 의미다. 그 용맹한 나라가 12~13세기 세계적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바투르라는 단어가 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투르는 기원전 550년에 세워진 페르시아의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어찌 된 셈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바투르의 기원을 ‘신’이나 ‘주’(主)라는 뜻의 이란계 언어 바그(bag)에서 찾는 미국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베크위스(1945)의 주장을 살펴볼 만하다. ‘바그’라는 발음이 이후 초성 ‘ㅂ’ ‘ㅌ(ㄷ)’ 등의 변화를 통해 바투르가 됐다는 얘기다.

‘바그’와 ‘바토르’의 관계는 터키를 다녀온 다음해인 2017년 여름 찾아갔던 신장위구르의 성도 우루무치 여행에서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우루무치에서 한 시간 거리의 톈산산맥에 있는 한 호수인 천지(天池)에 가본 적이 있다. 1900m 높이에 있는 천지에 눈 녹은 물을 공급하는 봉우리 중 하나가 5천m 넘는 ‘보그다(bogda) 봉’, 또는 ‘보그다 산’이다.

한자로는 ‘박격달산’인데 어떤 한국인은 흔히 ‘박달산’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단군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 중 하나가 박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한자의 한국어 발음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당시 산행하는 내내 혹시 보그다가 바투르와 관련이 있을지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안탈리아 시내에 있는 오래된 고성. 서유럽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다시 나의 친구 ‘이브라힘 바투르’ 얘기로 돌아오자. 나는 그에게서 터키와 몽골의 관계에 이어, 터키와 한국이 왜 형제의 나라인지에 대해 듣게 됐다. 터키인은 흔히 1950년 한국전쟁을 많이 얘기한다. 터키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르며 만났던 터키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면 세 부류로 나뉜다. “6·25 때 우리 할아버지가 전쟁에 참전했다.” 이것이 첫째 부류이다. “6·25 때 내 친구 할아버지가 전쟁에 참가했다.” 두 번째 부류다. 마지막은 “6·25 때 우리 할아버지가 참전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정말 현지에서 많이 듣는 얘기다. 필자는 바투르에게 “왜 그렇게 6·25 얘기를 하며 ‘피를 나눈 형제의 국가’임을 강조하는가”라고 물었다.

“미국도 한국전에 참전했고 그래서 혈맹이라고 하지만 피를 나누었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피를 나누었다는 말은 혈연 관계에서 쓰는 말로 알고 있다.”

내 질문에 그는 “원래 터키와 한국은 몽골초원에서 같이 잘 살았다”고 답했다.

그는 자기가 배운 터키사에서는 터키와 한국 민족은 울란바토르와 셀렝게강 가운데에서 함께 살다가 터키는 서쪽으로 우리는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을 듣고 터키 정부에서 추천하는 터키사를 나중에 읽었는데, 그의 말 그대로였다. 터키에서는 청소년기에 이런 역사를 모두 가르친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터키인들은 자존심이 아주 강했다. 그것도 역사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역사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나에게는 그 자존심이 강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강한 자존심은 문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2006년 터키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무크(1952)의 소설 <하얀 성>을 보자. 오스만 튀르크의 왕자 얘기를 다룬 이 소설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귀족을 전쟁포로로 데리고 와서 자신의 노예로 삼아 르네상스의 교양을 같이 토론한다는 내용이다.

설정 자체가 충격적이면서도 강한 자존심이 느껴진다. 그 설정이 강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우리는 역사 시간에 매번 중국을 비롯해서 몽골과 일본 등에 당한 얘기만 배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의 비교언어 역사학자 주쉐위안(주학연·1942)은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우리역사연구재단 펴냄, 2009)라는 책에서, ‘퉁구스어’의 퉁구스라는 어휘의 옛 뜻을 ‘아홉’으로 보았다. 터키어의 아홉에 해당하는 단어가 ‘도쿠즈’(dokuz)이다. 그래서 터키를 떠나기 전 터키어의 숫자를 살펴보았다. ‘열’에 해당하는 터키어는 ‘온’(on)이다. ‘온’은 한국어 고어에서 ‘백’(百)을 뜻한다. 지금은 백보다 더 큰 ‘전체’를 뜻하며 ‘온 누리, 온통’에서 쓰인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온조대왕의 ‘온’(溫)은 따뜻하다는 뜻이지만, 소리를 빌려다 쓴 한자를 가차어로 사용했다면, 발음이 ‘열’을 뜻하는 터키어 ‘온’과 동일한 셈이다. 실제 온조가 건국한 백제의 ‘백’은 숫자 100을 뜻하고 백제의 원래 나라 이름은 십제(十濟)였으니 지금 터키의 열을 뜻하는 ‘온’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에 갈 때 그리스 알파벳을 좀 외우고 간판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듯이, 터키에 갈 때 터키 알파벳은 그리 어렵지 않기에 숫자까지 외우고 가려고 했다. 터키에서 택시를 타고 만난 첫 터키인은 당연히 택시 기사였다. 도쿠즈(아홉)라는 단어와 온(열)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택시요금 관련 대화를 했더니 터키 택시 기사가 무척 좋아했다. 이런 언어의 유사성은 한국인과 터키인이 혈연적 관계라는 터키 역사 교과서의 주장을 얼마나 뒷받침하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한때 영어 선생님을 하려고도 했던 이브라힘 바투르는 자신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까지도 잘 설명해주었고, 나의 관심을 많이 돌려놓았다. 안탈리아 호텔에서 이브라힘 바투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우리 일행이 인근의 유적지로 다니고 있었다. 오래 걸리는 길이라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혹시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이 2016년이니 그 질문을 했던 때는 2002년 월드컵으로부터 14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며 말을 끊다가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죠”라고 말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라는 그의 말 때문일까? 그의 눈빛에서 말할 수 없는 따뜻한 온기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안탈리아 시내 거리 상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터키 상인.

터키/글·사진 장운(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필자 장운은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20여 년간 EBSi 등 온·오프라인에서 입시 논술 강의를 하며 <청소년 개념어 지도>(양철북 펴냄)를 출간했다. 동양과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여행을 통해 구체화하고자 2014년부터 해마다 무작정 ‘길 위의 코리아 흔적’을 찾아 국외로 떠나고 있다.

외국을 나가면 한국인이 민족주의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이곳저곳 다니면서 우리와 비슷한 것을 볼 때면 묘한 느낌과 감정을 가지게 됐다. 남을 통해 나를 더 정확히 알 수도 있기에 길 위의 여행은 ‘나와 우리’를 찾는 여행이 되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여행이 멈춘 상황에서 지난 여행을 정리하며, 코로나 이후 다시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월 1회 연재.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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