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깊게, 사회를 넓게’ 아마추어 극단의 세상 읽기

김보근 선임기자의 ‘직장인 극단 좋은사람들’ 워크숍 공연 관람기

등록 : 2019-04-04 16:17 수정 : 2019-04-0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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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 확산에 직장인 극단 활기

‘홀로’ 흐름 속 함께하는 연극 인기

관객들 “배우 연기력 뛰어나

나도 도전해보고픈 마음 생겨”

‘직장인 극단 좋은사람들’ 신입 배우들이 신입 워크숍 공연 작품 <개>(극본 엄현석, 연출 김동운)에 출연해 생애 첫 무대 연기를 펼치고 있다. 개를 발로 찼다가 재판을 받고 갇혀버린 제약회사 영업사원 ‘봉수’(신입 단원 박철희 씨 분·맨 왼쪽)에게 고시원 송 총무(신입 단원 이지슬씨 분·왼쪽에서 세번째)가 말을 건네고 있다.

“내가 개를 죽였다고? 고작 개를 죽였다고 날 이렇게 가뒀다고?”(직장인 극단 좋은사람들 신입단원 박철희씨 분)

“억울한 사실이 곧 진실이 되는 세상입니다. 인제 그만 인정하세요, 봉수씨!”(직장인 극단 좋은사람들 신입단원 최인영씨 분)


3월31일 오후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예술공간 혜화’. 두 남녀 배우가 화려한 조명 아래서 연극 <개>(극본 엄현석, 연출 김동운)의 대사를 주고받는다. 주말도 반납하고 판촉 활동을 열심히 하던 평범한 제약회사 사원이 개를 걷어차 맨홀에 빠뜨렸다가 재판까지 받는 이야기가 배우들의 대사에 실려 빠른 템포로 이어진다.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의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도 대사의 흐름에 따라 높아졌다 낮아진다. 이날 예술공간 혜화에서는 <개>와 함께 다른 연극 두 편이 무대에 올랐다.

신입 워크숍 작품2에 출연한 구혜경 신입 단원(왼쪽)과 김하순 신입 단원

공연 중간중간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를 끊임없이 자아내던 이 세 작품은 전문 배우들의 공연이 아니다. ‘직장인 극단 좋은사람들’(cafe.daum.net/qodntmxoq)의 2019년 신입 단원들이 벌인 ‘15기 신입 워크숍’ 공연이었다. 신입 단원들이 불과 3개월 만에 무대에 올린 공연이지만, 관객들은 감탄사를 쏟아냈다. 공연을 관람한 회사원 최숙희씨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뛰어나 아마추어 배우가 맞나 싶었다”며 “나도 한번 연극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일반인들의 아마추어 극단 활동이 크게 늘고 있다. 2005년부터 직장인 연극 활동을 해온 김동운(45) 좋은사람들 부대표는 “10년 전쯤 40여 개에 불과하던 서울 지역 아마추어 극단이 현재는 80여 개로 두 배쯤 늘어났다”고 한다. 아마추어 연극 인구가 많아졌음은 올해로 40회째를 맞은 ‘근로자연극제’ 신청 극단의 증가에서도 확인된다. 연극제를 주관하는 KBS미디어의 김송이 피디는 “올해 참가 신청을 한 근로자 극단은 50여 곳으로, 지난해보다 대여섯 곳 정도 늘었다”고 말한다. 2003년 네이버 카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아마추어 극단 ‘플레이고어’의 예호근 부대표는 “한 공연을 올리려면 배우와 연출·스태프 등 10명 이상의 단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청 극단이 여러 곳 늘어난다는 것은 상당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아마추어 연극 인구가 늘어난 데에는 주 40시간 노동제 정착,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에 대한 인식 제고, 늦어진 결혼 연령, ‘홀로’의 삶을 택한 젊은 층의 증가 등이 한몫한 것으로 분석된다. 김동운 부대표는 “아마추어 극단은 보통 저녁 8시에 연습한다”며 “예전에 야근이 많았던 때에는 직장인이 이 시간을 지키기 어려웠는데, 이제 ‘6시 칼퇴’가 늘어나면서 아마추어 극단이 활성화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젊은 층이 ‘저녁이 있는 삶’을 살면서 다양한 취미 생활을 해, 아마추어 극단들도 함께 붐을 이룬다는 것이다.

신입 워크숍 작품2에 출연한 홍선표 신입 단원(사진 중앙)

올해 좋은사람들에 입단한 박철희(37)씨는 워라밸을 고려해 3개월 전 직장을 6시 퇴근이 가능한 곳으로 옮겼다. 이번 워크숍 작품 <개>에서 주연인 ‘봉수’ 역을 맡은 박씨는 “퇴근 뒤 취미 활동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가 연극을 선택하게 됐다”고 한다. 힘든 목표를 성취한 자기에 대한 보상으로 연극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역시 좋은사람들 신입 단원인 한의사 서윤정(31)씨는 “이번에 한방내과 전문의 자격증을 얻고 바쁜 병원 수련 기간을 끝낸 기념으로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연기에 도전했다”고 한다.

연극이 ‘혼자 넘을 수 없는 산’이라는 점도 ‘홀로’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매력을 더하는 요소다. 연극은 상대 배우와 호흡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팀플레이 게임’이다. 배우뿐만 아니라, 연출과 스태프와의 호흡도 중요하다. 대본 낭독에서부터 완성된 공연 작품을 만들기까지 전 과정을 ‘오프라인에서 만나 함께해야만’ 완성할 수 있다.

좋은사람들 신입 단원 홍선표(28)씨는 마임을 하다 극단에 가입했다. 홍씨는 “1인극이 대부분인 마임과 달리 연극은 여럿이 함께한다는 점에서 더 즐겁다”며 “사람을 보는 시각도 넓어지는 것 같다”고 한다. 근로자연극제와 서울시민예술축전 등에서 수상 경력이 많은 극단 플레이고어의 예준호 부대표 또한 연극을 하면 사람뿐 아니라 사회를 보는 시각도 깊고 넓어진다고 강조한다. 예 부대표는 “연극을 하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한다. “‘보통 생활인의 모습’을 무대에 올리면 심심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뭔가 사람과 사회를 ‘연극적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하게 되고, 자연히 사람과 사회를 보는 시각도 넓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신입 워크숍 작품3에 출연한 이수정‧김광우‧이종국 신입 단원(사진 왼쪽부터)

일반적으로 공연 날짜가 다가올수록 배우들은 몹시 고단해진다. 공연 3개월 전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씩 연습하다가, 공연 일주일 전부터는 날마다 연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형수경(46) 좋은사람들 대표는 “공연이 임박해 연습량이 많이 늘어나면 배우들이 육체적으로 힘들어한다”며 “이때 ‘다시는 연극을 안 하겠다’며 농담을 던지는 단원도 있다”고 말한다. 형 대표는 “그러나 배우들은 한 작품을 끝마치면 곧 다시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뜨게 된다”고 한다. 연극은 그렇게 중독성이 강하다.

축제와도 같았던 2019년 신입 워크숍을 마친 다음날인 1일 밤, 성북구 성북동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좋은사람들의 연습실에는 다시 불이 켜졌다. 5~6월에 열리는 근로자연극제 참가작 <그녀들 다시 통닭을 먹다>(극본 강병헌, 연출 김나리)의 연습이 시작된 것이다. 극단 연습장은 또다시 투박하지만 뜨거운 아마추어 연극인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글·사진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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