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생각해보니 나는 과거의 인연에 너무도 연연했다

잘 버리는 것에 대하여

등록 : 2019-01-3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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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자료로 어지러운 내 방

곤도 마리에에게 도움 청할까?

오래된 백팩 버리지 못하다

새 백팩 선물 받곤 다시 설렘

나도 그분이 절실히 필요했다. ‘정리정돈 컨설턴트’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그분 말이다.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는 새해 들어 뭔가 색다른 것은 없을까 두리번거리다 넷플릭스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유혹하는 제목이었다. 나야말로 그 버림이 절실했다. ‘창조적 혼란’이라고 이르기에는 내 상황은 심각하다. 날마다 글 쓰며 강연하는 ‘글로생활자’로 살고 있는 까닭에, 내 방은 온갖 책과 자료 더미들이 서로 레슬링 하듯 엉클어져 있다. 물건이나 자료를 버리지 못하는 내 오랜 습관도 한몫 거든다. 올해 초 지독한 감기를 앓은 것도 따지고 보면 방 안의 미세먼지 탓인지도 모른다.


나야말로 컨설팅이 화급했다. 작은 공간에 쓸데없이 많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정돈된 삶, 더 나아가 심플한 라이프를 살도록 돕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프로그램을 이끄는 주인공은 일본 여성 곤도 마리에, 그는 정리정돈을 주제로 책을 써서 이미 40개국 이상에서 1100만 부나 판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라 한다. 그는 미국 가정을 방문해 발을 디디지 못할 정도로 방 안이 어질러져 있거나 혼란스러운 옷장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차츰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정리는 필요하다. 하지만 과연 단순하게 사는 것만이 정답일까?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의 차이란 무엇일까?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그렇다면 소중한 책이나 물건들은 그렇다 치고, 가족이나 친구 같은 인간관계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꼭 설레서 함께 살고, 설레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버리고 나면 꼭 그 자료나 책이 필요한 순간이 오고 무척 후회하게 되는 징크스 같은 것이 있다. 살다보면 쓸모없는 것, 혹은 도구나 목적으로는 대단치 않을지 몰라도 심리적 위안이 되는 것들도 적지 않다. 내게 그런 물건 가운데 하나가 등에 메고 다니는 백팩이었다. 그것은 대표이사를 그만두고 나올 때, 직원들이 건네준 선물이었다. 그들의 말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동안 일하느라 고생하셨으니 지금부터 이 백팩을 메고 자유롭게 여기저기 여행하세요. 그리고 그곳에서 경험한 신선한 이야기와 에너지를 저희에게 나눠주세요.”

그 가방은 단순히 물건을 넣어 다니는 도구가 아니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열정, 사랑, 애틋함이 잔뜩 묻어 있는 소중함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지친 나는 그 백팩을 메고 세상 여기저기를 걷고 다니며 육체와 정신의 번아웃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때 보고 들은 이야기를 여러 권의 책으로 풀어냈다. 결과적으로 그 백팩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가방은 인문 여행자로서, 글을 쓰고 강연하는 삶으로 나를 이끈 것이다. 하지만 그 백팩은 끈이 너덜너덜해지고 구멍도 났다. 여행길에 소매치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최근 지인이 새로운 백팩을 선물로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 가방과 작별할 때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인연들도 이제는 편하게 놓아주시죠.”

생각해보니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과거의 인연에 연연했다. 아무리 이쪽은 좋은 뜻이라고 해도 상대방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때가 되면 보낼 것들은 보내야 한다. 게다가 나에겐 설렘이 필요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일만 하느라 도무지 흥분되는 것을 찾기 어려웠다. 바로 그때 새로운 가방이 내게 온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가방은 자유직업을 의미한다. 예술가들도 가방을 들고 여기저기 이동하는 삶을 산다. 체코의 프라하로 떠난 모차르트, 영국 런던으로 간 헨델, 유럽의 왕궁을 두루 방문한 루벤스는 모두 일거리가 있고, 주문이 있는 곳을 찾아 여행 가방을 챙겨 떠났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헝가리 출신 유대인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딘가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것이 내게 어울린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언제나 가방을 꾸린 채 살아가는 것이 유감스럽지 않다.”

가방은 곧 정체성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옛 가방을 버리긴 아까웠다. 그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지인이 내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직장생활을 하다가 동남아로 이주해 살고 있다.

“저는 한국에서 영원히 2등 국민, 아니 3등 국민을 면할 수 없더군요. 혹시 저에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열정을 저도 느껴보고 싶어서요.”

그렇게 내 옛 가방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났다.

며칠 전이다. 새로운 백팩을 메고 글쓰기 강좌에 가던 날 새로운 수강생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제가 너무 나이 들어 다른 분들에게 민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몇 번이나 망설였습니다. 다른 강좌에 가면 모두 여자들만 있어서 들어가기도 쑥스러웠어요. 늦었지만 용기를 내서 신청했습니다.”

그는 나와 띠가 같고 무려 24살이나 많은 분이었다. 젊은 직장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수강생들 가운데 누구보다 열심히 듣고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자기 인생을 글로 정리해 후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새로 시작하고 배우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가방과 그 가방이 맺어준 새로운 인연 덕분에 다시 설렘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 비워야 채울 수 있는 법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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