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만 남은 천변 판잣집…화장실 오물이 그대로 ‘풍덩’

3대 사진가 임인식·정의·준영, 한국사 80년 ⑧ 청계천

등록 : 2018-10-04 15:51 수정 : 2018-10-05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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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한 청계천 풍경을

3대 사진가 30년 단위로 포착 기록

1대, 50년대 집 모양새·주거 양식 등

세밀하게 찍어…“기록 의미 중시”

2대, 질주하는 청계고가 자주 찍어

“고가도로는 서울 근대화 상징”

3대가 포착한 21세기의 천변에는

활기와 다채로움이 넘쳐


1954년 여름, 1대 임인식 작가가 찍은 청계천 3가~5가에 걸친 판잣집 풍경. 왼편 저 멀리 흥인지문이 보인다.

청계천의 변화는 ‘집’에서 먼저 드러났다. 청계천변 약국집 아들이었던 소설가 박태원이 <천변풍경>을 써 청계천 서민들의 수수한 일상을 잡지에 연재한 때가 1930년대 후반이었다. 일제강점기도 다부지게 견딘 동네가 6·25 전쟁을 겪으며 완전히 변했다.

기울어진 판잣집들이 전후 천변의 뚜렷한 풍경

북악, 인왕, 남산의 물이 하나로 모여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은 조선 시대부터 백성의 삶과 어울려 생활 하천 기능을 했다. 대대로 아낙들 빨래터로 이름이 높다가 6·25 전쟁 뒤 가난한 피난민들이 모여들며 골목마다 궁핍에 젖어들었다.

1대 사진가 임인식이 6·25 전쟁 직후 찍은 청계천변 사진은 다른 지역과 달리 분량이 제법 됐다. 연유를 정확히 알 순 없었다. “워낙 작업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과묵한 분이셨으니….” 2대 임정의(73) 작가가 아버지 대신 그 시선을 헤아려볼 뿐이었다. 당시 임인식 작가가 애용했던 카메라 ‘라이카 스리에프’(Leica 3F) 화각으론 강폭을 한 번에 담기 어려웠다. 그는 저 멀리 흥인지문을 소실점으로 두고 왼편 한 번, 오른편 한 번, 일렬로 들어선 판잣집을 찍는 식으로 천변 특유의 50년대 풍경을 차분히 기록해나갔다.

1953년 겨울, 1대 임인식 작가가 찍은 청계천 수표교 옆에서 썰매 타는 아이들.

임인식의 천변 풍경은 사람 얼굴 가까이 앵글을 밀어넣는 대신, 멀리서 집의 모양새와 주거 양식, 풍경과의 관계를 관찰하는 것이 특징이다. “1953년 청계천 판잣집을 보세요. 집 뒷면이 조금씩 수면에서 떠 있죠. 당시 판잣집 화장실은 오물이 청계천으로 바로 떨어지게 지었어요. 강변에 밭이 있었는데, 그 오물이 비료가 되거나 한강으로 떠내려가요. 청계천 5가에서 6가까지 군복 염색하는 공장도 많았죠. 큰 드럼통에 불을 때서 검정 물감을 넣어 천을 염색하고, 그 염색약도 청계천으로 흘려보내요. 환경보호 개념이 없었던 시절 얘기예요.” 임정의의 말이다.

청계천 판잣집을 더 낮춰 ‘하꼬방’이라고도 했다. 상자를 뜻하는 일본어 ‘하코’와 한국어 ‘방’이 더해진 합성어인데, 기와 올릴 돈이 없어 판자로 대충 빗줄기만 막은 집을 말했다. 소설가 박완서의 소설 <50년대 서울 거리> 속 묘사대로 “말뚝을 개천에 꽂은 천변의 하꼬방”들은 장마가 오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따로 없었다. 둥둥 떠내려가는 온갖 세간을 장대로 건져 올리는 게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라는 자학성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서울 폭염에 구렁이랑 살모사로 몸보신 한다고, 청계천 다리 아래서 껍질 벗겨 먹는 풍경도 일상이었죠. 다리 밑에 가면 솥 올린 식당들이 있었는데 양복 입은 직장인도 많이들 와서 먹었어요. 그 시절 아버지는 이처럼 글자 있는 간판 등을 일부러 찍어 남기셨어요. 인화하고선 촬영한 연도를 사진 뒷면에 정확히 적어두셨고요. 다분히 의도하신 거죠. 먼 훗날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당대 풍속을 알 수 있기를 바라지 않으셨을까 짐작하고 있어요.”

1953년 여름, 1대 임인식 작가가 찍은 청계천. 홍수로 불어난 강물이 광교 다리까지 차 올랐다.

가난까지 덮는 개천 복개와 고가 건설

청계천이 서울시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1971년. 빈민촌을 ‘제거’하고 가난을 가리는 방법으로 하천 복개가 유행이던 때다. 청계천을 복개한 도로 위에 폭 16m 길이 5.6㎞ 되는 청계고가가 완공됐다. 1970~80년대 서울 여행을 다녀온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선 차가 공중에서 떠다닌다!” 외친 소문의 진원지였다. 임정의의 사진첩에도 차가 씽씽 달리는 청계고가가 빈번히 담겼다.

“고가가 곧 서울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니까요. 교통난이 해소됐죠. 고가도로 한번 타면 광화문과 무교동에서 마장동을 거쳐 답십리로 빠질 수 있는데다가, 남산 1호 터널과 연결되니 강남으로 쉽게 갈 수 있고요. 다들 움직임이 빨라졌어요.”

1986년 2대 임정의 작가가 찍은 청계고가.

카메라 들고 길에 나서면 간첩 등 불순분자로 의심받던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대는 눈치 보며 사진 찍는 일에 이골이 난 시기이기도 했다. 임정의에게 ‘양담배 단속반’과 청계고가 추격전을 벌이며 “일직선으로 서울을 가로지르며 속도감”을 느낀 일이 유쾌한 추억으로 남은 이유다.

“외제 담배 피우는 게 불법이었어요. 오늘날 음주 단속하듯 정부에서 양담배 단속을 했거든요. 어느 날 내가 무교동에서 한잔하고 택시를 타는데, 멀리서 양담배 피우는 것처럼 보였나봐요. 전매청 단속원이 따라붙더라고요. 괜히 골려주고 싶었던 거지. 도망가는 척 왕십리까지 청계고가를 타고 질주했어요. 단속원도 쫓아오는데, 확실히 빠르더라고요.”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지만 당시 천변은 “서민들의 낙원”이었다며 회상을 이어간다. “청계천 근처 무교동만 가도 정겨웠거든요. 무교동 낙지볶음에 술 한잔 하고 고가 타고 퇴근하는 게 80년대까지 서민들 일상이었는데 이제 많이 변했죠.”

1998년 2대 임정의 작가가 찍은 청계고가와 삼일빌딩.

3대 사진가 따라 청계천 시간 여행

개발 시대의 한 축을 담당한 무소불위의 청계고가도 시간 앞에선 속절없었다. 청계고가가 다시 도시 슬럼화의 주범으로 꼽히던 90년대, 천변은 변화 앞에서 들썩이고 있었다. 2003년 시작한 청계천 복원공사로 나라가 온통 시끌시끌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호기롭게 삽을 뜬 청계천 현장은 공사 방식부터 이주한 주민들 입장까지 여전히 찬반론이 분분하다.

2018년 가을의 초입, 3대 임준영(42) 작가의 청계천변 촬영은 평화롭게 진행된 편이다. 청계광장 초입 모전교에서 청계9가 고산자교까지, 22개나 되는 다리를 품은 21세기 천변 풍경 감상은 어땠을까. “제 눈에 띄는 장소는 종로3가 주변이에요. 파고다빌딩, 한화빌딩, 미래에셋 등 고층 빌딩이 즐비한 곳이지요. 천변은 고요하고 은은한 불빛들이 전부인데, 거기서 많은 사람이 거니는 풍경이 어울려 말 그대로 활기차더라고요.”

조선 시대 때는 북촌과 남촌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나누던 청계천이었다.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영역에 오늘날 서울시청과 금융 재벌기업들의 본사가 잇따라 자리잡고 몸집을 키웠다. 약 30년 시간 단위로, 청계천변을 촬영한 3대 사진가들의 사진첩은 같은 자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변화무쌍하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종로3가에서 더 거슬러 오르면 세운상가와 평화시장 권역이다. 개발과 재생을 사이에 둔 21세기 경계선이 만들어진다. 지난봄 세운상가 권역도 집중 촬영했던 임준영은 ‘서울만의 특징’이라며 운을 뗐다. “변화가 빠른 서울이잖아요. 모든 게 변해도 사진가들의 업은 비슷한 부분이 있죠. 건축물과 주변 관계를 유심히 관찰해 기록으로 남기는 것 말이에요.”

2018년 가을, 3대 임준영 작가가 찍은 청계천 수표교와 천변풍경 (Like Water 35). 사람을 만드는 요소인 ‘물’의 이미지를 덧입혀 청계천의 생명력을 표현했다. (@juneyoung_lim)

기획·글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사진 청암사진연구소, 임준영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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