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리 출신 어머니, 영조의 지극한 효심

50년 만에 일반 개방한 칠궁

등록 : 2018-08-23 14:25 수정 : 2018-08-2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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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낳은 후궁 7명을 모신 사당

영조, 생모 사당 짓고 육상궁 승격

장희빈과 사도세자의 생모 등 모셔

68년 1·21 사태 이후 출입 통제

종묘와 함께 귀중한 유산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과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를 모신 연호궁이 있는 건물 모습. ‘연호궁’(延祜宮)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이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사당 육상궁입니다.”

조지영 문화재 해설사는 천한 무수리 출신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효심은 지극했다고 설명했다. 영조는 1725년 경종을 이어 왕위에 오르자마자 어머니 숙빈 최씨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숙빈묘’라 칭했다. ‘빈’은 조선 시대 궁인에게 수여하는 종1품 품계의 명칭이고 ‘숙’은 휘호다. 영조는 20년 뒤 1744년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의 육상이라는 묘호를 올렸고 영조 29년인 1753년에 궁으로 승격해 육상궁이 됐다. 영조는 재위 기간 52년 동안 육상궁을 200여 차례나 방문했다.


8일 오후 3시, 50년 만에 일반 개방한 칠궁 관람에 나섰다. 칠궁은 조선 시대 왕이나 추존 왕을 낳은 후궁 일곱 명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정식 명칭은 ‘서울 육상궁’(사적 제149호)이다. 조선 후기 한양 도성 안에는 육상궁 외에도 왕을 낳은 후궁의 신주를 모신 곳이 여럿 있었다. 고종과 순종 때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의 신주를 옮겨왔고, 1929년에 덕안궁을 옮겨와 칠궁에는 조선 시대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셨다. 선희궁과 경우궁, 육상궁과 연호궁은 한 건물 안에 각각 두 명의 신주를 모시고 있어 신주는 일곱이지만 사당 건물은 모두 다섯이다. 동쪽 권역에 육상궁이 자리해 나지막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 권역은 네 개의 사당이 서로 인접해 있다.

영조가 육상궁을 지을 때부터 있었다는 느티나무.

청와대 옆 무궁화동산에 모여 출입증을 받은 뒤 안내를 따라서 5분 정도 걸어가자 칠궁의 고풍스러운 재실 정문과 외행각이 눈에 들어왔다. 송죽재와 풍월헌, 삼락당을 지나 중문 안으로 들어갔다. 육상궁과 연호궁 입구는 문이 3개인 삼문 형태로 구성돼 있다. 조 해설사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에서는 영혼이 가운데 문인 신문을 사용하고 동쪽 문을 왕, 서쪽 문을 제관과 신하들이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삼문과 신도를 지나 사당 앞에 섰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와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가 한 건물 안에 모셔져 있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합사돼 있는 곳이다. 건물을 올려다보니 육상궁 현판은 보이지 않고 연호궁 현판만 눈에 들어왔다. 연호궁은 진종(추존 왕)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영조의 명으로 효장세자(진종)의 아들이 되어 왕으로 즉위했다. 효장세자는 사도세자의 이복형으로 정조에게는 큰아버지가 된다. 연호궁 현판 뒤쪽으로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는데 육상묘라고 쓰여져 있었다. 조 해설사는 “공간이 협소해서 앞 뒤로 현판을 배치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제례를 지내는 공간인 대전.

육상묘 현판 글씨는 영조가 직접 쓴 것으로 현판 위쪽에 붉은 글씨로 어필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어째서 육상궁이 아닌 육상묘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을까. 원래 영조가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승격한 뒤 육상궁이라는 현판을 내렸지만 이 현판이 고종때 불에 타 없어지자 다시 옛 육상묘 현판을 꺼내 걸었다는 설이 있다고 조 해설사는 설명했다. 육상묘 현판에는 작은 글씨로 ‘계미 맹하’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데, 계미년 무더운 여름이라는 뜻으로 계미년은 고종 20년인 1883년이다.

제례를 준비하던 재실, 송죽재(오른쪽)와 풍월헌(왼쪽)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육상궁과 연호궁 옆문을 나오면 냉천(우물)에서 흘러나온 물이 네모난 자연(연못)으로 흘러들어 간다. 영조는 어머니 제사를 지낼 때 냉천의 차가운 물로 목욕재계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침방나인 시절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조 해설사는 “냉천과 냉천정, 자연은 뒤쪽의 산자락과 어울려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냉천 옆에는 ‘봉안각’이라 했던 전각 ‘냉천정’이 있는데, 봉안각은 어진(임금의 그림)을 넣어둔 곳이란 뜻이다. 조 해설사는 “바쁠 때 오지 못해도 어머니가 자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도록 어진을 넣어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쪽 권역 모습

냉천정을 지나 칠궁의 서쪽 권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삼문 안으로 들어가니 덕안궁이 눈앞에 나타났다. 덕안궁은 영친왕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덕안궁 뒤쪽에는 나란히 서 있는 3개의 사당이 나온다. 왼쪽부터 원종(추존 왕)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를 모신 저경궁,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를 모신 대빈궁,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를 모신 선희궁과 순조의 어머니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를 모신 경우궁이다.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중전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그를 모신 대빈궁의 기둥은 다른 사당의 사각기둥과 달리 유일하게 둥근 기둥으로 되어 있다. 대빈궁 문의 경첩 장식도 다른 사당보다 더 많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의 기둥은 모두 둥근 기둥이다. 궁궐에도 격이 높은 경복궁 근정전은 둥근 기둥으로 돼 있다. 조 해설사는 “한때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장씨의 권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건축양식”이라고 설명했다.

칠궁은 종묘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제사 공간이다. 종묘에는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칠궁은 종묘에 배향되지 못한 후궁들을 따로 모신 곳이다. 그래서인지 종묘처럼 원형이 온전하게 보전되지 못하고 많이 훼손됐다.

칠궁 서쪽 권역에 있는 저경궁(왼쪽부터), 대빈궁, 선희궁과 경우궁의 모습.

칠궁은 북한이 박정희를 시해할 목적으로 특수부대원들을 내려보낸 1968년 ‘1·21 사태’ 이후 출입이 통제됐다. 이후 2001년 11월부터 청와대 특별 관람객에게 제한적으로 개방하다가 50년 만인 올해 6월부터 일반 관람객에게 시범 개방하고 있다. 칠궁은 2만4187㎡(7330평)의 면적에 고건물 18개 동이 들어서 있는데, 관람하는 데 20~30분가량 걸린다. 원래 2만 평 규모였지만 청와대가 들어서고 1·21 사태를 겪으면서 7천 평 규모로 줄어들었다.

찌는 듯한 더위도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칠궁 나들이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7월부터 12월까지는 휴궁인 일·월요일을 제외한 주중(화~금)에 매일 5회씩 개방하고, 토요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총 10회로 늘려 개방한다. 회당 관람객은 100명으로 제한된다. 칠궁 관람은 입장일 6일 전에 경복궁 누리집(www.royalpalace.go.kr)에서 사전 예약하면 된다.

조 해설사는 “칠궁은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더불어 조선 시대 왕실에서 사당을 어떻게 짓고 운영했는지 알게 해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앞으로 관람 규모를 점차 확대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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