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찍은 달동네…가장 ‘서울다운’ 현장

3대 사진가 임인식·정의·준영, 한국사 80년 ② 도시인들의 고향, 골목의 탄생

등록 : 2018-07-05 14:58 수정 : 2018-07-1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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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종군사진가 임인식

50년대 가회동 골목 풍경 수천 장

54년 민간인 최초 서울 항공사진 찍어

아들에게 현상, 길 잃으면 찾아오라고

골목에서 자란 아들 임정의

80년대 달동네 테마 몰두하다

‘부끄럽고 못사는 모습’ 찍는다며

경찰에 ‘간첩 아니냐’ 조사당하기도


손자 임준영,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에

드론 띄워서 착공 전 모습 포착


2대 임정의 사진가가 1989년 찍은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 달동네 동호대교 부분. 임씨가 석 장으로 나눠 찍은 것을 한 장으로 연결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38번지. 절대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거기가 서울에 장만한 우리 가족의 첫 집이었거든요. 북촌에 유일한 초가집이었어요.” 임정의(73) 사진작가가 볼펜을 들고 종이에 집 한 채를 그린 뒤 길쭉한 길을 냈다. 한 호흡 쉬었다가, 길 한가운데에 굵은 선을 찌익 그었다. “동네 아이들끼리 장난치고 노는 거예요. 여기가 바로 ‘3·8선’이라고. 선을 넘으면 잡혀간다고.”

‘가재’ 들고 뛰어다닌 북촌 골목

1958년 임인식 사진가가 찍은 가회동 골목에서 놀던 동네 아이들.

청계천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북촌’이라 했다. 2010년대 들어서 국내외 여행객이 밤낮으로 몰려드는 ‘과잉 관광’ 문제로 골목마다 몸살을 앓고 있지만, 불과 60여 년 전 북촌은 서울 다른 동네처럼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랑곳없이 놀거리를 찾는 동네 꼬마들만 그곳의 근심 없는 주인이었다.

골목대장들은 틈나는 대로 진군했다. 걷다보면 큰길(북촌로)과 맞닿았고, 큰길은 학교와, 학교는 북악산에서 출발한 물길과 자연스레 맞닿았다. 결국 어디로 가든 골목길 끝에는 사람과 냇물이 고여 있어 아이들은 놀기 바빴다.

1954년 겨울, 가회동 골목길 (임인식 촬영)

1954년 겨울, 가회동 골목길 (임인식 촬영)

“재동초등학교가 6·25 때 폭탄을 맞고 반이 부서졌어요. 휴전하고 폐허 속에서도 애들은 공부하고 뛰어다니죠. 수업 끝나면 삼청공원 냇가로 몰려가서 가재를 잡았어요. 집으로 가져가 키우기도 했고요.” 당시 재동초등학교 ‘국민학생’이었던 임정의의 회상이다. 그가 운영하는 광진구 청암사진연구소의 캐비닛에선 아버지 임인식(1920-1998)의 50년대 흑백사진과 롤필름, 이제 골동품이 된 라이카 스리에프(Leica 3F) 카메라가 하나둘 나왔다. 윤이 나는 카메라는 여전히 잘 작동했다.

1953년 여름, 전후 부서진 재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하는 아이들 (임인식 촬영)

50년대 북촌 골목 풍경을 수천 장 사진으로 남긴 임인식은 한국전쟁 중 국방부 사진대 대장으로 종군했다. 1952년 전시 도중 군에서 나와 남대문로에 ‘대한통신사’를 열고 사진 작업을 이어갔는데, 종군기자의 카메라에 수수한 사람 사는 풍경이 잡히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집에 지붕 올리면 사진 찍고, 화장실 공사하면서 찍고, 마당에 시멘트로 수도시설 만들면 기공식 한다면서 찍고. 때마다 우리를 그 옆에 세우는 거예요.” 집이 제 얼굴을 갖출 때마다 아이들도 같이 자랐다.

골목은 날마다 새로웠다. 아침에 조무래기들이 구슬과 공깃돌, 딱지 등을 챙겨 학교에 가면, 상인들이 쌀과 잡화를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느릿느릿 나타났다. 여름엔 골목이 뻔히 보이는 앞마당에서 ‘다라이’에 물을 받아 목욕하고, 겨울엔 뒤엉켜 눈밭을 굴렀다.

1955년 어느 여름날 아침, 가회동 38번지 초가집 대문 앞에서 임인식 사진가가 교복입고 학교에 가는 어린 아들과 딸을 촬영했다. (왼쪽 임정의 오른쪽 임옥희)

골목에선 길을 종종 잃었다. 1954년 여름, 임인식은 사진가로서 민간인 최초로 경비행기를 타고 서울 상공에 올라 전후 서울을 촬영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찍은 사진들 중 가회동 사진을 조그맣게 현상해 어린 아들 호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길 잃어버리면, 사진 보고 집을 찾아오라면서 말이죠.” 임정의는 사진을 볼 때마다 그때 그 골목으로 돌아가곤 했다.

1954년 여름, 1대 임인식 사진가가 경비행기를 타고 올라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가회동 항공사진. 1930년대 전후 주택건설업체 건양사에서 대단위 한옥 단지를 지어 분양했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 있다. 서민들 주택난 해소를 위해 중대형 필지를 분할해 구획형 개발이 이뤄졌다. 도시형 근대 한옥(개량 한옥)의 등장이었다.

“왜 부끄러운 것들만 찍는 겁니까?”

1956년 5월 15일, 가회동 골목. 제 3회 대통령 선거하는 날. (임인식 촬영)

1960~70년대 서울. 골목은 밀어버리고 도로가 뻗어나갔다. 전찻길은 철거하고 지하도와 고가도로를 건설했다.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이 “도시는 선이다”라는 구호를 시정 전면에 내세우며 ‘싸우며 개발한다’는 맹렬한 자세로 도심 재개발에 덤비던 때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 난 1981년 직후, 봉천·난곡·금호·행당·상계 등 달동네들이 도시 경관을 해친다며 일제히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됐다. 임정의는 도시 외곽 구릉지에 간신히 붙어 있는 마을, 특히 ‘재개발지구’로 낙점된 동네와 ‘불량 주택’으로 분류된 집을 찾아다녔다. “많은 것들이 너무나 빠르게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쉬웠어요.”

가회동 골목에서 자라 창신동 쪽방에서 사춘기를 보낸 탓인지 모른다. 혹은 금호동 달동네에서 신혼을 보낸 거주지 경력 때문일 수 있다. 임정의는 라이카 아르식스(Leica R6) 카메라를 들고 ‘제거’되기 직전 80년대 달동네 현장, 가파른 꼭대기마다 올랐다. 서민들의 지난한 삶은 그 지점에서야 뷰파인더에 잡혔다.

1954년 임인식 사진가가 찍은 가회동 골목길.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방향이다.

“키 큰 사람이 양복 입고 카메라에 삼각대 메고 오르락내리락하니 수상하게들 봤죠. 달동네 사람들도 내가 기관에서 나온 줄 알고 피하고, 신고를 받아서 경찰서에 간 적도 있어요. 경찰이 ‘왜 서울의 잘사는 모습을 찍지 않고, 부끄럽고 못사는 모습만 사진 찍냐’고 물어요. 당신 ‘간첩’ 아니냐고.”

중동 건설 붐과 잇따른 국가 행사 유치로 국내에도 건설 붐이 일었다. 건축설계 현상공모가 많았던 시절, 당시 중요 건축모형 촬영을 도맡았던 임정의는 번 돈을 달동네 촬영으로 족족 ‘까먹기’ 시작했다. 아내는 성이 나서 골동 카메라와 필름 뭉치를 내다버렸다.

“그때는 ‘뭘 해도 서울로 가야 한다’고 말했던 때였어요. 전국 사람이 서울로 몰리고, 개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달동네에서 삶을 꾸리던 시절. 서울시가 그 많던 달동네 마을 중 하나만이라도 보존했으면 싶었어요. 그랬다면 그리스 산토리니 못지않은 그 미학적 아름다움이 오롯이 남았을 텐데. ‘달동네’만큼 서울다운 단어가 또 어디 있겠어요?”

서울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기록

임준영(42)이 지난 1주동안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을 탐색한 것은 고민 없는 선택이었다. 할아버지는 비행기로 가회동에 올랐고, 아버지는 달동네에 올랐다. 임준영은 ‘드론’을 챙겨 백사마을이 있는 불암산 구릉지에서 여러 차례 띄웠다. 잊힌 세월을 찾아보고자 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란 별명을 가진 백사마을은 1967년 도심 재개발로 용산·청계천·안암동 판자촌 주민들이 강제 이주를 당하며 형성됐다. 서울시 집계로 현재 낡은 집 1천여 채가 남아 있다. 올해 본격적인 정비 사업이 추진됐는데, 서울시는 보존형 도시재생과 철거형 재개발을 병행하는 새로운 정비 방식을 백사마을에 도입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20년 6월 착공에 들어간다.

3대 임준영 사진가가 2018년 여름, 드론을 이용해 찍은 백사마을. 불암산에서 달동네로 흘러들어가는 골목길과 길 주변에 후작업으로 반딧불이 빛을 입혔다. '임준영 사진가(@Juneyoung_lim)'

“산을 깎고 짓는다고 다 좋은 게 아닐 텐데 말이죠. 지형 그대로 살리면 좋겠다 싶어요.” 착공 전에 마을 원형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는 임준영의 말이다.

3대 사진가가 서울을 담아온 카메라는 수동카메라에서 반자동카메라를 거쳐 자동카메라로, 이제 드론까지 넘어온 셈이었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달동네 세월만 멈춘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오래된 선대의 사진 속 모습과 오늘날 모습이 다르지 않아 놀랐습니다.” 임준영 작가가 마음에 느낀 바를 사진에 적어 보냈다. 마을 속 아득한 골목길은 만나고 엇갈리며 낙후한 동네의 주름이 됐다. 개발 후 골목길 끝은 어디로 닿을지, 지켜볼 일이다.

기획·글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사진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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