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안 들여다보니 빗살무늬 한옥들이 즐비

김란기의 서울 골목길 탐방 서울 성북구 돈암동 보문동 일대 한옥마을 골목-상

등록 : 2016-04-21 17:11 수정 : 2016-04-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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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보문동1가의 근대식 한옥 지구. 빗살 모양은 한옥은 연립형 한옥이다. 4채가 연이어 있지만 각각의 독립된 마당과 대문을 가지고 있다.
빗살 모양 한옥 동네를 아시나요?

요즘처럼 초록이 생동하는 계절에 삼선교에서 성북천변을 따라 걷다 보면 푸르른 수목들 말고도 멋진 동네 골목도 볼 수 있다. 눈을 들어 골목 안 여기저기를 들여다보면 바로 한옥들이 즐비한 마을이 보인다. 바로 서울 성북구 돈암동, 보문동, 안암동 일대이다.

천변 성북구청의 멋진 현대식 건물을 지나 지하철 보문역을 향해 가면 오른쪽에 일단의 오래된 근대 한옥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범상치 않다. 물론 좁은 골목과 처마들이 다닥다닥 붙은 광경은 다른 지역의 한옥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의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보니 근대 서양에서 지었던 ‘핑거형’ 주택들이 아닌가? 우리말로 하여 ‘빗살 모양 한옥’들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런데 어지간히 낡았나 보다. 지붕을 군용 텐트 천막천 같은 것으로 덮은 집이 꽤 된다. 왜 이렇게 낡았을까? 자세히 보니 재개발을 앞두고 곧 철거될 지역이다. 보문2주택 재개발지역이다.


이 빗살 모양 한옥들은 한쪽은 끊어짐 없이 이어져 있고, 다른 쪽은 손가락처럼 돋아나와 있다. 말하자면 ‘ㄴ’자 혹은 ‘ㄱ’자의 한옥이 한쪽 변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어 있다. 그러면서 각각의 ‘ㄱ’자 혹은 ‘ㄴ’자가 한 가구를 이룬다.

어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한채씩 따로 지으면 건축비도 비싸고 허비하는 공간도 많아진다. 그러니 연결해서 지으면 일거양득이다. 전통적인 생활 관습이 몸에 밴 서민들을 위해서 전통적인 건축 형태로 싸게 공급하기 위해 발휘한 지혜가 아닌가! 요즘은 이런 집을 ‘연립형 한옥’이라 한다. 이렇게 독특한 한옥 마을이 곧 사라지게 되다니!

그렇다면 이들 한옥들은 언제 지었을까?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분들일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이 동네에 ‘그 남자네 집’이 있다고 한다. 어디쯤, 어느 집일까? 소설가 박완서는 자전적 소설 <그 남자네 집>에서 ‘안감천변’으로 이사 왔다고 했다. 안암천이 아니고 안감천이라 하니 궁금해진다. 안암내라고도 하고, 그 상류는 성북천이다. 그런데 박완서는 안감천변라고 했다. <그 남자네 집>의 첫머리에 “그 남자네가 안감천변으로 이사 온 것은 우리가 그리로 이사 간 지 한 달도 안 돼서이었을 것이다. 우린 아직 새집이 자리가 잡히지 않아 어수선할 때였다”고 했다.

1.1989년 가을 성신여자대학교 도서관 건물 위에서 본 돈암동의 한옥들. 줄지어 선 근대식 한옥 건물들은 두줄 사이를 골목으로 나누어 대문을 내고 있다. 듬성듬성 수직으로 세워진 전봇대마저 좋은 경관을 연출한다. 2. 지붕에서 본 ‘빗살 모양 한옥’은 ‘ㄴ’자가 한 가구이고 이어지는 지붕은 옆집이다. 대신 독립된 안마당과 대문을 가지고 있다. 안마당에 화초와 채소를 가꾸어 가슴 넉넉한 모습을 보인다. 3. 빗의 등이 되는 부분은 ‘빗살 모양 한옥’의 연속된 부분이다. 그러나 각각의 집들은 그들의 벽 색깔을 달리하고 있다.

‘새집이 자리가 잡히지 않아…’라는 대목은 이 집과 동네의 연대를 짐작케 할 수 있다. 이 동네 한옥들의 역사와 이 소설이 맞물리기 때문이다. 박완서가 돈암동에 살던 시기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결혼하기 전까지로 알려졌다. 그러니 소설가가 안암동에 살던 시기는 1950년대 초·중반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집을 찾아가 볼까? 1989년 나는 성신여자대학교의 도서관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셀 수 없이 많은 한옥들이 줄지어 새까맣게 들어앉아 있었다. 집들은 대부분 똑같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집들은 여러 사람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이 지은 것이다. 그리고 한채씩 지은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지은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지었을까?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던 시기인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토지구획정리사업(1937)’이란 것을 시행한다. 그러면서 경성부(서울시)의 경계를 획기적으로 넓히고 그 면적을 크게 증가시킨다. 본래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와 안암리였는데 경성부의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 4대문 안에 인구가 밀집하기 시작하자 도시 확장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혜화문 밖 삼선평을 비롯한 돈암 안암 농촌 지역을 근대적 도시 지역으로 편입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1941-1945년)을 일으킨 일제는 본래 계획대로 해나갈 수 없게 되었다. 중일전쟁(1937년)을 일으킨 일제는 1939년이 되자 이미 물자가 부족하게 되었고 본래 일본식 주택지로 개발하려 했던 계획은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토지를 민간에 분양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토지를 사들인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줄지어 지었을까? (계속)

글·사진 김란기 ‘살맛나는 골목세상’ 탐사단 운영 문화유산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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