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범람에 맞선 제방, 새 아파트촌의 ‘요람’이 되다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⑤ 1960년대 말 동부이촌동 아파트단지 조성

등록 : 2023-05-0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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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까지 물 넘친 을축년 대홍수 뒤

‘신용산~원효로’ 중심 제방 쌓기 시작

홍수 나면 옮겨다니던 동네 ‘이촌동’도

60년대 말 강변북로 생기며 택지 조성


68년 34개동 공무원아파트 들어서고

1970년 대규모 한강맨션아파트 건설


적산가옥 밀집지역 중심이었던 부촌이

한강변으로 이동하는 계기로 작용해

우리 역사상 가장 큰 홍수였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용산구는 대부분 물바다를 이루었고 남대문 앞까지 한강물이 밀려왔다고 한다. 시내 전차는 물론 모든 철도도 운행이 중단됐다. 이 홍수로 사망자가 404명에 이르렀으며, 침수 면적은 21억 평이었다고 하니 그 피해 규모는 오늘날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러한 대규모 수해를 겪고 그 이듬해부터 쌓기 시작한 제방이라고는 ‘신용산~원효로’와 그 반대편으로 ‘노량진~영등포’가 전부였다. 동부이촌동에도 제방이 있었으나 당시 경성에 주둔한 일본군 기지(현 용산가족공원) 앞에서 끝났고 거기부터는 경원선 철길이 곧 제방이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한강대교 북쪽에 있는 용산구 이촌동은 1960년대 중반까지 거대한 백사장으로 한여름 서울시민들이 강수욕장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한편 큰 장마 때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홍수를 피해 옮겼던 관계로 동명도 이촌동(移村洞)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이촌동(二村洞)으로 한자를 바꿔 쓰게 되었다.

한편 이촌동은 이런 지리적 이유로 선거철마다 많은 군중이 모일 수 있는 유세장으로도 사용됐다. 일례로 이곳에서 개최된 제3대 대통령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의 1956년 5월 3일의 소위 ‘한강 백사장 유세’를 보자. 그 유세는 아마도 유권자 수에 비해 보면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인파였을 것이다. 당시 서울인구는 150만이었고, 유권자는 70만3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날 운집한 인파는 약 30만 명이었다. 유세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용산 삼각지 이남으로 가는 전차와 버스는 밀려드는 인파로 운행이 중단됐을 정도였다.

압구정동 북쪽에 위치한 저자도를 폭파해 그 흙으로 매립해 건축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이랬던 허허벌판의 이촌동이 1960년대 말 천지개벽됐다. 1967년 당시 ‘강변1로’라 칭했던 제1한강교에서 영등포까지 3.7㎞의 자동차전용도로를 건설했다. 그런데 그 도로가 완공되자 안쪽으로 2만4천 평의 새로운 택지가 생겼다. 이촌동 역시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역시 그 전에 백사장으로 버려졌던 땅에 강변도로가 건설되면서 지금의 고급 아파트단지로 전변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전후 복구와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도시개발이 거의 없었던 서울에서 마포아파트(현 마포삼성아파트)가 1960년대 전반기를 반영하는 아파트의 대표라면, 1960년대 후반기 한국 경제를 상징하는 아파트단지로 동부이촌동이 탄생한 것이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필동, 후암동, 청파동 등 적산가옥이 밀집된 곳이 소위 서울의 부촌으로서 지위를 차지했다면 1960년대 말 동부이촌동을 시작으로 서울시에 새로운 부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68년 34개 동의 공무원아파트가 이곳에 들어섰고 바로 이어 1970년 한강맨션아파트가 건설됐다. 한강맨션아파트의 경우 27~55평으로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호화로운 형태라서, 국영기업체가 사치를 조장한다고 물의를 빚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여 1970년대 이후 아파트 대형화 바람이 불었고, ‘맨션=고급아파트’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이렇게 주택공사의 아파트들이 성공하자 민간업자들이 이 지구에 아파트를 건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74년 서울시는 앞으로 건립될 아파트에 ‘맨션’이란 용어와 외래어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요즘 무슨 뜻인지도 모를 외래어가 난무하는 아파트 이름을 볼 때면 외래어 명칭 사용 금지 정책만큼은 또다시 고민해볼 만한 정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한강변에 제방도로를 건설해 택지를 개발하는 방식은 밤섬을 폭파해 그것으로 여의도에 윤중제를 쌓음으로써 87만 평의 여의도를 얻었던 것을 비롯해 1960년대 서울에 새로운 택지를 공급하는 주요한 방식 중 하나였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정문.

이런 방식은 1970년대에도 이어졌다. 1970년에는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저자도를 폭파해 그것으로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를 매립해 약 5만 평의 택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공사를 당시 현대건설이 주도했기에 ‘압구정동=현대아파트단지’가 형성된 것이다.

참고로 저자도는 고종 때 조선의 마지막 부마였던 박영효에게 하사된 사유지였다. 하지만 홍수 때면 섬 전체가 물에 잠기는 등 이름만 섬이었다. 이에 따라 저자도에 관한 소유권도 말살됐다. 하천법과 건설부 고시에서 하천을 “하수가 계속하여 흐르고 있는 토지, 매년 1~2회 이상 상당한 유속으로 (강물이) 흐른 형적을 나타낸 토지”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서울시는 저자도를 폭파할 수 있었다.

한편 압구정동은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이 있던 터라 지어진 지명이다. 기록에 의하면 분명 고종 말년까지도 압구정이 있었지만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지금은 그저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압구정 터임을 알리는 바윗돌만 우뚝 서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한강변의 택지개발을 통한 아파트 건설은 1970년대 초반 곳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반포지구·잠실지구·구의지구 등이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 주택단지들이다. 그런데 구의지구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일이 있다. 구의동 일대에 제방을 쌓고 땅을 매립해야 할 때는 이미 다른 곳들의 매립으로 그곳에 매립할 흙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나온 방안이 지하철 1호선 공사장에서 나온 흙으로 매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모자라 연탄재로 매립해 택지를 조성했다. 하지만 이것이 땅으로 다져지기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에 당장 건축행위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곳에 1980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변역이 생겼지만 몇 년 동안 승하차객이 없던 무인정거장이었다. 지하철 2호선은 1980년 10월31일 동대문구 신설동과 잠실 종합운동장을 연결하는 14.3㎞ 구간이 가장 먼저 개통됐다. 강변역은 이 사이에 있었지만, 안전을 우려해 정차하지 않은 것이다. 지하철 2호선은 1984년 5월 22일 완전 개통돼 순환선이 됐다.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이 있던 곳. 압구정 현대아파트 72동 뒤편에 있다.

그리고 강변역 주변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선 이유도 참 흥미롭다. 현대가 1차적으로 매입한 곳이 이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강남개발을 위해 사대문 안에 있는 고등학교들을 강남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에서 서울시는 1977년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한 옛 경희궁 터 약 3만 평을 현대건설에 110억5천만원에 강매했다. 그 후 현대는 그곳에 그룹 본사와 외국바이어 전용 호텔을 계획했지만, 이것이 알려지자 여론은 경희궁을 복원해야 한다는 쪽으로 들끓었다. 이때 1985년 염보현 서울시장은 청와대에 가서 민심 수습책으로 경희궁 터 공원화를 제안하고 발표했다.

이렇게 정세가 변화되자 현대는 자사에 강매한 경희궁 터와 새롭게 택지로 조성된 구의지구 택지를 감정가격으로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경희궁 터 감정가 약 500억원과 강변역 주변 약 5만 평이 맞교환됐고, 그곳에 지금의 현대아파트단지가 건설된 것이다. 결국 서울시는 110억원에 판 땅을 7년 뒤 500억원에 되산 셈이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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