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 억제’ 물결 속에서 소공동 개발의 출발점 되다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③ 1970년대 롯데호텔 건설

등록 : 2023-03-0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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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가장 번화했던 소공동 일대

조선식산은행과 반도호텔 자리잡아

70년대까지 강점기 모습 그대로 유지

롯데에 국영재산 불하 뒤 빠른 변화 보여


‘강남 개발’ 적극 추진 분위기 속에서

롯데에 ‘백화점’ 아닌 ‘쇼핑센터’로 허가


재벌 사옥들 저마다 대형화 시작하고

남산 관련한 스카이라인도 만들어져

우리는 예로부터 집을 지을 때 배산임수에 남향을 기본으로 하는 풍수지리를 따랐다. 따라서 조선의 궁궐도 북악산을 주산으로, 청계천을 명당수로 하는 종로구가 중심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인의 주요 거주지가 청계천 이남에 형성되면서 경성의 중심은 종로구에서 중구로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은 당시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총독부도서관, 조선철도호텔, 반도호텔 등이 있는 바로 소공동 일대였다.

소공동이란 본래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살았던 곳이다. 속칭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소공주동이라 했고 이를 줄여 소공동이라 불렀다. 그 뒤 조선 말기에는 고종이 그곳에 원구단을 세워 자주국가를 지향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이곳에 총독부 주요 기관과 호텔 등을 세웠다.

그 후 해방은 됐지만 격렬한 좌우대립과 3년간의 전쟁 그리고 무능한 자유당 정권을 거치면서, 서울의 도시환경은 새로운 도시개발이 추진되지 못한 채 1970년대까지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①롯데백화점(왼쪽, 조선식산은행 터)과 롯데호텔(반도호텔 터)

그러나 1970년 11월, 당시 주일대사 이후락이 재일동포 사업가 신격호를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소개함으로써 을지로1가 소공동의 변화가 시작됐다. 박 전 대통령은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 등 소공동 일대의 국영재산을 롯데그룹에 불하해줬다. 그 뒤 소공동 일대는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이 건립되는 등 빠르게 변화해갔다.

요즘 사람들이 볼 땐 그냥 “고층빌딩이 하나 새로 들어섰나보다” 할 정도지만, 당시 서울 시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1960년대 말 있었던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울진삼척사건 등과 1970년대 베트남전쟁을 지켜보던 박정희 정부는 항상 전쟁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강 이북에 많은 인구가 집중하는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커다란 장애였다. 따라서 ‘강북 억제, 강남 개발’이 최대 관심사였다.

②소공동 롯데타운

박정희 정부는 당시 강북으로의 인구 집중을 금지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다.

이를 위해 1972년 서울시는 종로·중구에서는 술집·호텔 등 유흥시설 일체의 신규 허가는 물론이고 장소 이전도 불허했다. 또 ‘특정시설제한구역’이란 제도를 신설해 서울시에는 제조업체, 백화점, 고속버스정류장, 도매시장, 대학 등을 못 세우도록 법적 조치까지 마련했다. 1975년에는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 금지조치’를 내놓았다. 이 조치를 통해 강북에는 아파트 신축과 민간택지 개발이 금지됐다. 그뿐만 아니라 1975년 법원, 검찰청 등 관공서의 이전을 발표하고, 1976년에는 경기고를 필두로 도심 대부분 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이에 더하여 입시학원들(종로·대성·대일·상아탑 등)과 예식장들(종로·제일 등)조차 사대문 밖으로 쫓아냈다. 극단적으로 도심부 호텔에서는 결혼식조차도 할 수 없었다.

③신세계백화점(왼쪽, 옛 미쓰코시백화점)과 옛 제일은행(이전 조선저축은행)

이런 상황에서 소공동 롯데호텔이 1979년 문을 연 것이다. 명분은 세계의 국빈급 인사에 대한 영접과 국제행사를 치르겠다는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통치권자의 힘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0년 말부터 1970년대 초반 국영기업이나 대형 관급공사를 불하해주는 식으로 대기업을 관리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정치자금을 마련했을 거라 추정된다. 동아건설에 대한통운을, 한진상사에 대한항공공사를, 삼성에 영빈관(현 신라호텔)을 불하했으며, 현대건설에는 경부고속도로 시공을, 럭키그룹에는 호남정유를 인수하게 해줬다.

그리고 롯데에는 을지로1가 소공동 개발권을 줬다. 외형상으로는 공매입찰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은 수의계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이 불하 과정에서 선택받은 기업들이 지금의 재벌로 성장했다.

④환구단과 조선호텔(조선철도호텔 터

롯데호텔이 들어선 자리에는 국립중앙도서관과 반도호텔이 있었다. 반도호텔은 일제강점기 흥남질소비료공장의 소유주인 노구치 시다가후가 세워 1938년 4월1일 영업을 시작한 호텔이다. 당시 내로라하는 부자였던 노구치는 작업복을 입고 최고의 호텔이었던 조선호텔에 들어가려 했으나 저지당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이에 노구치는 조선호텔 옆에다 조선호텔보다 높은 8층으로 호텔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사무실을 두어 조선호텔을 내려다보며 일했다고 한다. 해방 뒤 미군정 사령관이었던 하지 장군의 집무실이 있던 곳도 반도호텔이었다. 그리고 지금 롯데백화점이 들어선 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식산은행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이렇게 롯데에 허가를 내줄 때 걸리는 게 있었다. 그것은 ‘특별시설제한구역’으로 설정된 사대문 안에 백화점을 세우지 못하도록 한 정부 규제였다. 당시 정부 입장에서 볼 때, 백화점을 못 짓게 해놓았는데 그것을 스스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쇼핑센터’였다고 한다. 실제로 롯데백화점은 1979년 출범 당시 상호명이 롯데쇼핑이었으며, 회사 이름을 롯데백화점으로 바꾼 것은 1988년이다.

⑤화폐박물관(옛 조선은행)의 정초석,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

한편, 당시로서 서울시 최고층 건물이 된 롯데호텔이 건설되면서 재벌기업들은 사옥을 대형화하기 시작했다. 도심부 건물의 대형화·고층화에 찬반이 일었지만 양쪽의 공통된 의견은 북한산과 남산을 가리는 것은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

특히 청와대 경호실에서는 을지로 이북에 대한 고층화를 반대했다. 이에 서울시는 롯데타운이 형성된 을지로1가 소공동을 기준으로 북악산과 남산에 접근할수록 점차 낮아지는 스카이라인을 만들었다.

이런 을지로 롯데타운 건설과정은, 공군의 반대를 제압하고 2009년 최종 허가가 난 지상 123층 규모의 잠실 제2롯데월드 건립 과정과 겹친다. 이 두 곳의 건설과정은 국가최고권력의 의지가 개입됐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제2롯데월드와 관련해서는 그 외에도 전혀 다른 성격의 복병이 하나 더 존재한다. 바로 대자연이다.

⑥서울중앙우체국(왼쪽, 경성우체국 터)

제2롯데월드가 서 있는 곳은 본래 한강의 본류가 흘렀던 곳으로 잠실도의 남쪽에 있는 곳이다. 하지만 1971년 남쪽 물길을 매립해 잠실도를 섬에서 육지로 만들었다. 지금은 그 흔적으로 석촌호수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곳은 100년 전까지 한강의 지류가 아닌 본류였다. 2014년 큰 화제가 됐던 ‘싱크홀’(땅 꺼짐) 문제도 잠실의 이런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1968년 윤중제를 건설해 여의도를 개발할 때 서울시는 영등포 방면의 샛강을 매립해 잠실처럼 육지화하려 했지만 건설부가 반대해 지금의 모습으로 개발됐다. 당시 건설부의 반대 논리는 100년에 한 번쯤 있을 대홍수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대홍수 중 가장 최근의 것은 1925년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였고, 그때 잠실도의 본류와 지류도 바뀌었다. 바로 그곳에 국내 최고층 건물이 서 있는 것이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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