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가까운 건물이 전하는 ‘우리가 몰랐던 용산’

서울의 작은 박물관 ㉕ 용산구 용산역사박물관

등록 : 2023-02-16 16:11 수정 : 2023-02-1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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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옥상정원. 옛 용산철도병원의 옥상정원을 재현했다.

1928년 준공된 용산철도병원 건물

여러 차례 주인 바뀌다 2008년 문‘ 화재’

2022년에는 박물관으로 재탄생돼

용산의 영광과 아픔 담은 전시품 선봬


용산 풍경 담은 조선시대의 그림들은

용산 앞 한강을 ‘용호’라 부른 때 전하고


전국으로 통하던 교통 중심인 용산이

외세에 의해 군사기지 된 아픔도 생생

용산의 역사가 전시된 건물 자체가 전시품인 박물관이 있다. 100년이 다 돼가는 옛 용산철도병원 본관 건물이 문화재가 된 건 2008년, 그 건물에 2022년 용산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용산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봤다. 용산 앞을 흐르는 한강을 용산강, 용호라고 부르던 시절을 담은 그림은 처음 보는데 오래 그리워했던 풍경이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고 윤슬을 가르며 떠가는 조각배가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옛 용산철도병원 현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지금도 남아 있다.

박물관이 된 옛 병원

1900년 개통된 한강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한강에는 조각배가 떠다닌다. 파란 물결 한강과 강기슭 나무와 풀밭의 초록빛이 선명하다. 옛 용산철도병원 본관 건물 1층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풍경이다. 스테인드글라스는 1928년 이 건물이 준공될 때 만들어졌다.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기는 했지만 원형 그대로 보존했다고 한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곳은 병원 본관의 현관이었다. 현관의 아치형 구조와 스테인드글라스가 준공 당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옛 용산철도병원의 흔적을 모아놓은 공간도 있다. 1937년 신관에 있었던 약국 창구는 1970년대에 증축할 때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 같은 해 증축된 신관 병실 내부 창문도 볼 수 있다. 병원의 각 방 천장에 설치된 환기시설과 난방했던 방열기도 전시됐다. 본관에 달았던 문도 있다. 병원의 문 가운데 현관, 출입구, 약국의 문은 물푸레나무로 만들어 니스칠했고 진료실 문은 잣나무로 만들고 페인트칠했다고 한다.

당시 옥상에 정원을 만든 것도 특기할 만하다. 1920년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옥상정원을 이 건물에도 도입했다. 편평한 옥상에 정원을 만들어 환자들의 치유를 도왔다.

용산철도병원은 철도 종사원과 그 가족, 철도 재해를 입은 사람, 철도 여객의 위생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특수병원이었다. 하지만 일반 환자도 치료와 진료를 받았다. 1928년 당시 내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소아과, 치과, 부인과, 피부과 진료를 했다. 33명의 의료인이 있었고 병실은 52개였다.

용산철도병원은 1938년 경성철도병원으로 이름이 바뀐 뒤 광복 이후 서울운수병원, 서울교통병원, 서울철도병원으로 변모했다. 1984년부터 2011년까지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운영됐다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중앙대병원으로 운영될 당시인 2008년 옛 용산철도병원 본관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됐다.

박물관을 다 돌아보고 나가다가 안내데스크 주변에 있는 옛 물건을 보았다. 당시 지하에 있던 정련실과 1층의 약 조제실을 연결하는 수직리프트 시설의 일부였다. 이 리프트로 약재와 처방전을 날랐다. 지하층과 1층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덜고 이동 시간도 줄여주던 도구였다.


박물관에 전시된 옛 용산철도병원 약국 창구.

옛 용산의 풍경들

조선시대에 동호대교 일대 한강을 동호, 양화대교 일대 한강을 서호라 했다. 동호와 서호의 풍경을 그리고 읊은 사람이 많았다. 아름다운 풍경에 몸과 마음을 던져놓았던 옛사람의 시간이 지금까지 예술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노량진과 마포 사이 한강은 용산강 또는 용호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담담장락도>에는 현재 마포대교 북단 언저리에 있던 담담정과 그 오른쪽에 있던 읍청루가 한강과 산줄기가 만든 자연의 품에 안긴 장면이 담겼다. 강 건너 노량진과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강가에 솟은 절벽과 어우러진 담담정과 읍청루, 강나루에서 쉬는 배들, 강기슭에서 낭창거리는 능수버들이 한 폭의 그림이다. 담담정은 조선시대 세종임금의 아들인 안평대군의 정자였다.

조선시대에 지금의 동작대교 북단 국립중앙박물관 일대에 둔지산이 있었다. 둔지산에 살던 강세황이 둔지산 일대의 가을 풍경을 그리고 시를 지어 남긴 그림 <임거추경도>도 볼 수 있다. 가을 숲속의 집(임거추경)과 그 주변 풍경을 그림과 시로 남긴 것이다.

지금의 한남대교 북단 언저리에 제천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제천정에서 이현보의 전별연(헤어질 때 베푸는 잔치)이 열렸다. 그 장면을 그린 <무진추한강음전도>를 오래 보았다. 제천정과 그 일대 한강은 물론 멀리 청계산까지 그렸다. 정자에는 사람이 없고 정자 앞마당과 강기슭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그림의 중심부에 뱃놀이하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그들이 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보인다. 제천정이 한강정이라고 불리던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대접했다고 한다. 그만큼 경치가 뛰어났다는 얘기다.

세 편의 옛 그림, 처음 보는데 오래 그리워했던 풍경이다. 그림에서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고 윤슬을 가르며 떠가는 조각배가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박물관에 전시된 일제강점기 용산 일본군 기지의 일본군 사진.

용산의 역사를 보다

용산은 조선시대 수도 한양과 삼남지방인 충청, 전라,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영상과 입체모형도로 그 내용을 쉽게 알게 했다. 경상도로 이어지는 4대로, 수원 방향의 7대로, 전라도 쪽과 이어지는 8대로 등이 용산에서 갈라졌다. 4대로는 조선통신사가 오갔던 길이고, 7대로는 정조 임금이 아버지가 묻힌 능을 찾아가는 ‘화성능행차’ 길이었다. 8대로는 <춘양전>의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지났던 길이다.

한강과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길은 조운의 길이었다. 세곡선 등 삼남지방의 물자를 실어 나르던 배들, 1890년대 한강의 황포돛배,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던 사람들, 용산 나루와 한강을 따라 이어지던 작은 나루의 풍경을 담은 사진은 그림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일제는 수운과 육로 등 교통의 요지인 용산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용산의 역사를 담은 사진을 설명하는 안내글에 따르면 일제는 용산 일대에 118만 평 규모의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둔지산 기슭 둔지미 마을 사람들은 다 쫓겨났다.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정착한 곳은 보광동 마을 위쪽 산비탈이었다. 그곳을 ‘웃보광’이라고 불렀다. 우사당, 공동묘지, 복숭아밭, 솔밭 등 지금은 사라진 보광동 풍경에 둔지미 마을 사람들도 동화되어 살았다.

대경성 용산 대홍수 참상 사진첩에는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 범람한 한강 모습을 담고 있다. 용산역의 열차가 물에 잠기는 등 용산역 일대가 침수됐다. 안내글에 이태원을 제외한 용산 대부분이 침수되고 3만25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광복 이후 일본군이 떠난 용산 군사기지의 주인은 미군으로 바뀌었다. 삼각지에 화랑거리가 생긴 것도 주한미군 때문이었다. 주한미군이 삼각지에 있던 화랑에 초상화를 주문하기 시작했고, 소문을 타고 자연스럽게 화랑들이 모여들었다. 표구점과 액자를 만드는 가게도 그 거리에서 호황을 누렸다. 한국의 전통화나 풍경화는 물론 외국의 명화를 베껴 그린 그림도 많이 유통됐다고 한다.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에서 철도의 도시, 외국 군대 주둔지에서 외국인 거주지로 변모한 용산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실을 지나 숨은 역사를 기다리는 기증전시실에서 관람의 발길이 끝난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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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정보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관람 종료시간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휴관일: 매주 월요일, 매년 1월1일, 설날과 추석 당일

관람요금: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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