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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을 가로지르는 살곶이다리는 난간이 없어 양쪽으로 뻥 뚫린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입추가 지나며 기막히게 더위가 꺾이는 걸 보면서 ‘절기는 과학’임을 실감했다. 절기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1년을 24등분해 계절의 변화를 나타낸 일종의 농사력이다. 명절과 헷갈려 절기도 음력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절기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하고 명절은 달의 변화에 따라 정해진다.
어업 하는 사람들에겐 조수간만차를 알려주는 달의 모양이 중요하지만, 농사짓는 사람들에겐 태양의 위치가 중요하다. 우리 조상들은 필요에 따라 양력과 음력을 적절히 활용하며 살았으니 그 지혜가 대단하다.
역사 도시 서울을 두루 거닐다보면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되는 장소를 여러 곳 만날 수 있다. 살곶이다리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돌다리를 5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사람들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한 감동을 준다. 시간이 오래 지난 석조 바닥재의 따스한 색감이며 투박한 질감, 양옆으로 난간이 없어 시야를 가리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중랑천 경치는 또 얼마나 조화로운가. 여기에 장소와 관련한 옛이야기까지 더해지면 역사의 흐름 속에 현재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배가 된다.
살곶이다리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이용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교량이다.
살곶이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성수동 일대 평야를 부르던 옛 이름이다. 살곶이 이름의 유래를 따라가다보면 야사에 전해지는 함흥차사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함흥으로 보낸 사신이라는 뜻의 함흥차사는 연락이 두절되거나 감감무소식인 상태를 의미하는 고사성어다. 왕자의 난 이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버렸다. 태종 이방원은 함흥으로 수차례 사신을 보내 부왕이 환궁할 것을 설득했지만, 이성계는 사신으로 오는 이들을 족족 죽여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함흥으로 가겠다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는데 이때 태조와 막역했던 박순이 함흥차사를 자청했다.
결국 박순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이성계는 환궁을 결심했고, 아버지가 환궁한다는 소식에 태종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를 맞이하러 나온 곳이 바로 살곶이다. 이때 이성계는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아들 이방원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천막 기둥 뒤에서 부왕에게 절하라”라고 당부한 하륜의 조언 덕분에 이방원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를 보고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이 된 것을 천명이라 여겨 아들을 용서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연유해 ‘화살 꽂힌 벌판’ 즉, ‘살곶이벌’ 혹은 ‘살곶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살곶이다리를 건너 송정 제방길까지 대략 만 보 정도 걸을 수 있는 코스로, 평지길이라 보행하기 편하다.
함흥에서 돌아오는 이성계를 맞이하러 온 곳이 살곶이였다는 것만 보아도 이 지역이 조선 시대 한양으로 드나드는 주요한 교통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살곶이다리 공사를 처음 시작한 건 세종 2년이다. 세종은 행차가 잦았던 아버지가 중랑천을 쉽게 건너갈 수 있도록 돌다리 건축을 지시했는데, 오래지 않아 아버지 태종이 죽고 행차가 없어지자 공사는 중단됐다. 이후 성종 때 다시 백성들의 필요에 따라 공사를 재개해 성종 14년(1483)에 완성했다.
송정 제방길 한쪽으로 황톳길이 길게 조성돼 맨발걷기를 할 수 있다.
살곶이다리를 건너 송정 제방길까지 왕복으로 걸으면 대략 1만 보 정도, 1시간30분쯤 소요된다. 이 길이 이름난 벚꽃 명소이자 가을 단풍길이다. 조선 전기 때 문신 서거정은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는 시를 통해 당시 한양 10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바 있는데, 여기에 ‘살곶이는 꽃구경으로 유명하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지만 고즈넉한 살곶이다리와 유유히 흐르는 중랑천의 아름다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 번도 그저 쉽게 여름이 물러간 적은 없지만 이미 입추도 지났고 처서도 지났다. 우리는 분명 며칠 전보다 태양에서 멀어졌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는 대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잘 기억해뒀다가 가을이 오면 다시 이곳을 찾아올 생각이다. 살곶이다리에서 시작해 가을색으로 물든 송정 제방길을 걸으며 서거정이 노래했던 살곶이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