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

인생의 기록물이 필요한 이유

서울, 이곳 l 관악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록 : 2026-04-0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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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규장각도를 통해 정조 당시 규장각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올해 초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내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지켜오는 일이 하나 있다. 꼬박꼬박 지키고 있으니 습관이라 할 수 있고 꽤 재미를 붙였으니 취미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은 바로 일기 쓰기다.

초등학교 시절 숙제로 일기를 써야 했을 때는 일기 쓰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방학이면 고충이 배로 늘어나 개학 전날 한 번에 몰아 쓰느라 어쩔 수 없이 온 가족이 총동원돼 이야깃거리를 쥐어짜내야 했던 적도 있다.

그때는 ‘쓸 게 없다’는 게 제일 고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나’라는 사람의 짧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니 소소한 쓸 거리가 차고 넘친다. 오늘 만난 사람 이야기도 좋고, 요즘 나의 관심사나 아니면 우리 집의 모습 등 사소한 장면을 포착해도 좋다. 기록으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흘러 지나가버릴 나의 순간들을 일기장에 꽁꽁 매어두는 것이다. 먼 훗날 이 기록물을 보면서 증발했던 나의 기억을 꺼내 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짓고 관원을 배정해 정식 국가기관으로 출범시켰다.

새삼스레 일기 얘기를 꺼낸 건 오늘 소개할 곳이 조선왕조의 다양한 기록물을 보관하고 있는 왕가의 서고, 규장각이기 때문이다. 궁 안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부터 중요한 사건까지 빠짐없이 쓰고 그려 남겨둔 기록물이니 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승정원일기, 일성록, 의궤와 같은 왕실의 기록물은 물론 악학궤범, 동의보감, 대동여지도 등 다양한 서적과 자료가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관이다. 처음 규장각이 생긴 건 숙종 때인 1694년. 하지만 그때는 국왕의 초상화와 친필, 인장 등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작은 건물에 불과했다. 이것을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왕실도서관이자 정책연구기관으로 확대 개편했다. 정조는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키워 막강한 노론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조선의 역사에서 학문을 장려하고 신분의 장벽 없이 인재를 등용한 성군을 꼽자면 전기에 세종, 후기에 정조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최측근에 학문연구기관을 두고 정책에 적극 반영했다는 점이다. 세종 때 집현전이 그랬고,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는 그 집현전을 폐지했다. 성종은 홍문관을 설치해 집현전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정조는 규장각을 지었다.

정조 때 지은 규장각 전각은 창덕궁 후원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정조 때 지은 규장각은 창덕궁에 있다.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서면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연꽃 호수 부용지. 그 부용지 뒤편으로 서 있는 2층짜리 전각이 바로 규장각이다. 그렇다면 서울대학교의 규장각은 무엇일까.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내규장각과 외규장각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창덕궁 부용지 옆 규장각은 궁궐 안에 있다는 뜻으로 ‘내규장각'이라 불린다. 외규장각은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바로 이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의궤와 서적들을 프랑스로 약탈해 갔다. 이 기록물들은 2011년 프랑스로부터 영구 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반환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

서울대 규장각이 왕실의 기록물을 소장하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이후 규장각 자료는 조선총독부가 관리하게 됐는데, 이것이 다시 1928~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다. 광복 이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자료를 서울대가 관리하게 되면서 서울대가 규장각의 기록물들을 보관, 연구하게 됐다.

현재 이곳에 보관된 기록물은 세계기록유산 6종을 포함해 30만 점에 이른다. 즉, 창덕궁에 남은 건 규장각 건물이며, 왕실의 기록물을 보관하는 본래의 기능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하고 있는 셈이다.

봄꽃이 올라오기 시작한 관악산.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인기를 끌면서 조선왕조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들었다.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가볼 것을 추천한다. 매주 금요일 열리는 시민강좌도 있으니 이번 학기를 놓쳤다면 다음 기회를 노려봐도 좋겠다. 그뿐인가. 이제 막 봄꽃이 올라오기 시작한 관악산, 그리고 꽃보다 아름다운 청춘. 꼭 규장각이 아니어도 지금 이 계절 서울대 관악 캠퍼스를 방문할 이유는 충분하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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