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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헌에서 바라본 길상사 경내 모습. 수백년 된 보호수도 여러 그루 있고 도심에서 가깝지만 고요하다.
얼마 전 송년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친구가 안색도 별로고 음식도 영 못 먹고 있었다. 친구는 요즘 들어 조금만 먹어도 속이 더부룩해져 음식을 잘 못 먹는다고 했다. 소화가 안돼서 음식 먹기가 겁난다고 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안 좋은지 심각하게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는 뜻밖의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단은 친구가 얼마 전 구입한 보정속옷이었다. 몸을 꽉 조이는 옷을 입고 있으니 당연히 조금만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친구가 그 옷을 계속 입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옷을 백만원이나 주고 샀기 때문이란다. 어디 아픈 게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지만, 차라리 없었더라면 몰랐을 고통이란 생각이 들었다.
법정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 진영각이다. 이곳에는 법정스님의 영정과 친필 원고, 누더기 옷 등이 전시되어 있다.
몇 해 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구절구절 고개를 끄덕이며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는 스님의 말씀이 다시금 떠올라 길상사를 찾았다. 길상사는 1997년 창건한 절로,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과 기생 김영한의 시주 등 간직한 이야기가 많아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성북구 북악산 길 언덕에 자리한 길상사는 도심에서 멀지 않은데도 고요하기가 어디 깊은 산속에 온 듯하다. 사찰에서 일주문은 세속과 진리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를 의미하는지라, ‘삼각산 길상사’라 적힌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신기하게도 문밖과 문안이 전혀 딴 세상인 듯 구분 지어진다.
이 자리는 원래 군사정권 시절 이름난 요정 대원각이었다. 알고 봐서 그런지 분위기가 여느 사찰과는 사뭇 다르다. 아름답고 비밀스럽다. 대원각을 운영하던 이는 기생 김영한.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거나 그와 관련해 여러 이야기가 무성하지만, 확실한 건 김영한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대원각을 시주해 길상사가 세워졌다는 점이다. 창건 법회 때 김영한은 자신을 죄 많은 여자라 고백하면서,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던 팔각정에 이제는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게 소원”이라 말했다고 한다.
범종각. 김영한은 이곳에 맑고 장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길 소원했다고 한다.
운명이 기구하여 일찍이 기생이 되었고, 시절을 따라 많은 돈도 소유해봤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그가 바랐던 건 단 하나.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뜰에 뿌려지는 것뿐이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사랑했던 백석,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푹푹 눈이 나리는 날, 고요히 모든 걸 내려놓고 하늘로 돌아가고 싶었던가보다.
소유가 굴레인 것은 친구의 경우뿐이 아니다. 소유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값비싼 것이어서 족쇄가 되는 일이 세상엔 참 많다. 하나를 가졌을 때 뒤따르는 감사와 만족은 시효가 짧다. 하나를 갖고 나면 어김없이 더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광고로 덧칠된 타인의 일상을 사회관계망서비스로 들여다보면서 그들이 입은 옷, 가방, 시계를 자연히 알아가게 되고, 나도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유가 주는 만족보다는 무소유에서 오는 자유다.
삼각산 자락 북악산 길에 길상사를 비롯해 덕수교회, 성북동성당이 나란히 마주하고 있으며 세 종교가 화합해 매년 바자회도 열고 있다.
길상사 경내를 걸으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보았다.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더니 나를 변호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고 그들로부터 마음을 얻기 위해 애태웠던 시간이 떠올랐다. 소유란 그저 유형의 욕심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양껏 갖지 않아도, 양껏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다며 나를 다독였다. 사람을 만나 부질없이 주고받는 수많은 언어 사이로 내 마음을 썰물처럼 쓸려 내려보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길상사엔 이제 김영한도 없고 법정스님도 가셨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우리 모두도 그들처럼 이 자리를 다음 세대에 내어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많이 가졌던 이도, 많이 가지고 싶었던 마음도 모두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법정스님은 빈 마음이 우리의 본마음이며,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모쪼록 서울& 독자 여러분의 새해도 비움을 통해 채워지기를, 울림을 통해 삶이 더 생생해지기를 기대한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