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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이공화국 대통령 “놀 권리 담은 헌법 선포”

구로어린이나라 5월29일 건국 선포 어린이 대통령 13살 손지우양 선출 “학원 미루고 나라 만들기 열중”

등록 : 2017-07-2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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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9일 구로구의회에서 ‘구로어린이나라 건국 선포식’을 연 구로어린이나라 건국위원들이 나라 만들기에 도움을 준 이성 구로구청장(맨 왼쪽)과 박용순 구로구의회 의장(맨 오른쪽) 등 구 관계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 서남쪽에는 어린이들이 주인인 나라가 있다. 바로 ‘구로어린이나라’이다. 구로어린이나라의 초대 대통령인 손지우(13·사진)양과 또래 어린이 50여명은 지난 2년간 어린이 나라의 헌법을 만들고 행정부와 시민의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지난 5월29일 구로어린이나라 건국 선포식을 열었다. 행사를 며칠 앞두고 지우양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성 들여 손편지를 써 보냈다.

“만나고 싶은 문재인 대통령님께. 저는 구로어린이나라의 어린이 대통령이자 신미림초 6학년 손지우입니다. 5월7일, 대통령님께서 당선되시기 정확히 이틀 전 저도 어린이나라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줄임) 저희 구로어린이나라는 어린이들이 참된 민주주의를 체험하고 사교육에만 물들지 않으며 놀 권리를 보장받는 것을 추진하기 위해 헌법을 만들었어요. (줄임) 급하게 연락드려 죄송하지만 구로근린공원에서 이루어지는 저희 건국 선포식에 함께해 주신다면 큰 힘이 될 듯합니다. (줄임)”(아쉽게도 건국 선포식에 문재인 대통령은 참석하지 못했다.)

구로어린이나라는 2015년 이성 구로구청장이 아이들이 나라를 운영하는 경험을 실제로 해보는 민주주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 청장은 “가상이지만 아이들이 직접 나라를 만들어 꿈을 만나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했다”며 “담당자들에게 아이들이 스스로 하게 지켜봐주고 지원하는 일만 하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어린이나라 건국과 실제 나라 운영 과정에 구로구청은 지원만 할 뿐 간섭은 삼갔다.

그해 7월 지역의 초등 4~6학년 아이들 51명이 학교 추천으로 건국준비위원이 되었다. 이들은 4개 위원회(운영, 선거 관리, 조직 구성, 선포식 추진)를 만들어 다음 해 1기 정부에 참여할 어린이들 모집에 나섰다. 아이들은 3분짜리 홍보 동영상을 만들어 구청의 도움을 받아 지역 초등학교에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선발 방식과 과정도 아이들이 정해 진행했다.

홍보 동영상은 꽤 많은 어린이의 관심을 받았다. 지우양도 이 동영상을 보고 참여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이끌어가는 나라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동영상 마지막 장면에 어린이들이 종이비행기를 날렸는데, 어린이나라로 빨리 오라고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어린이나라 헌법은 아이들이 건국 준비 과정에서 가장 공들여 만들었다. 이들에게 헌법은 자신들이 꿈꾸는 나라의 모습을 담아 어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어린이나라 헌법 제1조는 “어린이는 키가 작은 어른이다”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과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헌장을 근거로 만들었다. 이는 어린이도 어른처럼 인격이 있고, 어른처럼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나라 헌법에선 어린이들에게 놀 권리와 쉴 권리가 있다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띈다. 지우양과 대부분의 건국준비위원도 헌법을 만들면서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현실에서 어린이들은 교육과 보호받을 권리는 비교적 잘 보장받고 있지만, 어린이가 놀고 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어른도 아이들도 잘 모른다.

지난 5월29일 구로 어린이들이 구로어린이나라 건국 선포식에 참여하고 있다. 구로구 제공
“교과서에서 배우는 민주주의에는 놀 권리, 쉴 권리 얘기는 없어요. 어린이나라에서는 이런 권리가 보장될 수 있게 헌법에 넣었어요.”


어린이나라 헌법에는 권리와 더불어 의무사항도 담았다. ‘상대방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기’ ‘다른 사람을 놀리거나 괴롭히지 않기’와 ‘스마트폰 사용 자제' ‘자살 불가' 등이다.

어린이나라는 망할 수도 있다.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때 자동으로 망한다. 또한 시민의회와 행정부가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얻지 못할 때, 시민의회 의원과 행정부 위원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은 때 망한다고 명시해놓았다. “어린이나라가 계속 이어지기 위해 대통령의 가장 큰 숙제는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도록 이끌고 위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거예요.”

대통령으로서 지우양이 꼭 이루고 싶은 것도 더 많은 친구가 어린이나라에 관심 갖고 국민으로 참여해주는 것이다. 누리집을 만들어 현재 50여명인 ‘어린이국민’을 더 늘리고, 나라 활동도 공개하려 한다. 정부와 의회 의원들이 자기 역할을 잘하도록 끌어냈으면 한다. “건국 준비 때도 열심히 하지 않는 친구들이 있어서 속상했어요. 민주주의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데, 고민이에요. 하고 싶은 일을 종이에 써내게 할까도 싶어요.”

지우양도 어린이나라 회의와 학원 가는 시간이 겹칠 때면 고민이 되기도 한다. 실제 건국 선포식 준비로 3주간 학원을 가지 못했다고 한다. “학원은 보충수업을 받기로 하고 미뤘지요. 어린이나라 참여는 제게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나라를 만들고 꾸려가면서 민주주의를 체험해보고 친구들을 배려하는 것도 배웠어요.”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내년 2월이면 지우양은 어린이나라의 명예 국민으로 돌아간다. 중학생이 되어도 어린이나라에 도움이 되고 싶어한다. 지우양은 “구로어린이나라가 민들레씨처럼 널리 퍼져나갔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다른 지역의 아이들도 직접 의견을 내고 결정해, 어린이나라를 만들어가며 민주주의를 경험해봤으면 한다. 비록 가상이지만 어린이나라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구로어린이나라는 8월17~18일 워크숍을 열어 어린이나라의 행정부와 시민의회 등 기본 조직 구성 문제와 나라의 운영 방향을 의논할 계획이다. 구로구 17개 초등학교 어린이나라 위원 42명이 참가해 열띤 토론을 벌일 것이다. 구로구 백경미 학교지원팀장은 이와 관련해 “워크숍은 외부의 관여 없이 어린이나라 위원들끼리 자체적으로 논의할 계획”이라며 “일반 국가의 형태처럼 조각이 이뤄질지, 아니면 어린이나라에 맞는 방식이 채택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현숙 기자 hslee@hani.co.kr, 사진 구로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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