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 말고 ‘함밥’으로 꿈꾸는 행복한 아파트

천왕동 행복주택 입주자 ‘라면 먹고 갈래?’로 이웃 간 벽 허물기, 커뮤니티 공간 확보 등 공동체 형성 노력

등록 : 2017-03-23 15:02 수정 : 2017-03-2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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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이펜하우스 702동 실버라운지에서 열린 ‘라면 먹고 갈래?’ 행사 모습. 청년층뿐 아니라 어르신들도 참석해 토요일 점심을 함께 나누며 한아파트 주민으로서 우애를 다졌다
“아이고 여기 사윗감 많네…총각은 뭐하는 사람이우? 몇 살이야? 고향은?” 지난 18일 토요일 낮 12시. 구로구 천왕동 천왕이펜하우스 702동 1층 실버라운지에는 라면 냄새가 가득했다. 한 아파트 주민끼리 얼굴이라도 알고 지내자라는 취지로 마련한 ‘라면 먹고 갈래?’ 행사가 열린 탓이다.

충북 음성에서 29살 된 딸집에 다니러 왔다가 행사에 참석한 정봉미(62)씨는 라면보다는 자리를 채워가는 청년들에게 관심을 더 보였다. “우리 딸이 29살이에요. 직장은 논현동인데….” 정씨는 딸이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입주자 80%가 청년 세대, ‘서로 알기’가 먼저

‘라면 먹고 갈래?’는 SH서울주택도시공사와 희망제작소가 함께 준비한 ‘2016년 주민참여형 행복한 아파트공동체 만들기’ 사업의 일환이다. 층간소음, 경비원 처우 등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아파트의 문제를 공동체를 강화해 풀어보겠다는 취지의 사업이다.

“우리 프로젝트 이름이 ‘뭐라도 프로젝트’예요. 아파트 내 유휴 공간에서 뭐라도 해보자는 거죠. 공동체를 만드는 게 목적인데 그렇게 쉽지는 않아요.” 행사를 준비한 고영정(32)씨는 동대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책도 갖고 있다. 7단지는 2015년 말에 입주가 시작됐지만, 아직까지 동대표조차 선출하지 못했다. 374세대의 입주자 80%가량이 직장생활로 바쁜 청년 세대인데다 거주 기간의 제한 등 한계가 있어 희망자를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다.

천왕이펜하우스 7단지는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 고령자 주거급여 대상자를 위한 행복주택이다. 사회초년생은 최대 6년까지, 입주해 있는 동안 결혼을 해 신혼부부로 자격이 바뀌어도 최대 10년까지로 거주 기한이 제한돼 있다.

“다들 바쁘잖아요. 근처에 마땅한 유흥거리도 없고…서로 얼굴이라도 알고 지내자는 게 우선 목적입니다.”


‘라면 먹고 갈래?’는 지난 1일 개최한 ‘집들이합니다!’에 이은 두 번째 행사다. 첫 행사는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나누며 한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난 7단지에서 이렇게 살고 있어요’는 참가자들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았다. 인테리어, 취미, 반려동물 등의 사진을 미리 받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였다. 같은 면적의 아파트인지라 기발한 공간 배치 아이디어에는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처지이자 같은 세대라 고민의 정도와 폭도 비슷해 유대 관계는 금방 형성됐다. 준비한 맥주 60병이 거의 동나면서 행사는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라면…?’ 역시 1차 행사와 같이 아파트공동체를 활성화하고자 기획했다. 휴일이면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외로움을 ‘함밥’으로 위로해보면서 서로를 더 알아가자는 의도다. 모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무엇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2차 행사를 여는 데 이유가 됐다.

‘라면…’은 1차 행사를 준비한 정시명(35)씨와 오명환(30)씨의 도움을 받아 이가연(26), 고영정(32), 권순환(32)씨 등이 준비했다. 이들은 ‘행복한 아파트 만들기 사업’ 워크숍 등에 참가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나른한 토요일 점심, 라면이 먹고픈 분들…” 메인 카피를 정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회의는 서로를 더 알아가는 기회이기도 했다. 입주자 대부분이 혼자 생활하기 때문에 라면 여러 개를 한꺼번에 끓일 냄비와 가스버너 등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미 개설해놓은 네이버 밴드 ‘천왕7단지 입주자 모임’에 행사를 공지하면서 냄비, 국자, 가스버너 등을 빌려줄 분을 찾는다는 글을 함께 올렸다. 국자와 냄비 등을 빌려줄 수 있다는 글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행사 당일 나눌 선물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 필요한 샴푸, 수건 등으로 준비했다. 필요한 수량은 역시 네이버 밴드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등에 A4 크기의 포스터도 붙였다. 한 아파트에 함께 사는 어르신 세대들을 위한 배려다.

행사 준비 측은 몇 명이나 참석해줄까 가슴 졸였지만 12시를 넘기며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관리사무소의 도움으로 준비한 테이블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입장하면서 추첨해 조를 나누고, 조별로 연장자를 대표로 뽑았다. 아직 풀지 못한 아파트 동대표 선출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자, 동대표는 주민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얼른 냄비에 물을 담아 오세요.” 냄비에 미리 준비한 뜨거운 물이 채워지고 가스버너에 불이 붙었다. 각 조장이 선택한 사다리를 따라 선을 그었다. “아…” 하는 탄식과 “와!” 하는 함성이 오가면서 서먹한 분위기는 금방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스프를 먼저 넣어야 맛있어요.” 낯선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라면을 끓이는 방법도 서로 달랐다.

라면이 끓는 중간중간에도 사회자가 낸 퀴즈에 답을 맞힌 조에게는 상으로 주는 만두와 달걀, 버섯 등이 도착했는데, 받자마자 다른 조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조별로 통성명이 오가면서 아파트살이에 대한 생활 팁과 주변에 대한 정보들도 오갔다.

‘라면 먹고 갈래?’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 세 사람. 왼쪽부터 권순환씨, 이가연씨, 고영정씨. 고씨는 동대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다.
다음번에는 고기 먹고 갈래?

1차 행사 때보다 참여자 수가 늘어난 어르신들에게 젊은 참가자들은 연신 라면이 담긴 종이컵을 건넸다. 외손주 김재형(31)씨와 함께 참여한 할머니는 “여럿이 먹으니 맛있네”라는 말로 젊은이들의 수고에 대해 인사했다. “이 김치는 사온 건가? 다음 행사는 언제 해요? 김치는 내가 갖고올게. 다음에는 사지 말아요.” 또 다른 어르신의 제안에 “와아!” 함성과 박수가 쏟아진다.

나누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고 했다. 비록 라면이지만 함께 나눈 한 끼는 천왕동이펜하우스 7단지가 살맛 나는 아파트로 변화하는 데 징검돌이 될 터이다.

‘고생하셨어요. 저탄수인을 위해 고기 먹고 갈래? 시급합니다’(702동 조경준). ‘고기먹고갈래? 위원장으로 조. 경. 준 님을 추천합니다’(701동 오명환). ‘동의합니다’(702동 김다솜). 네이버 밴드의 행사 후기에 달린 댓글들은 “북카페를 비롯한 커뮤니티 공간이 곧 만들어집니다. 운영 주체 선정이나 동대표 선출에 문제가 없을 겁니다”라는 바람이 곧 이뤄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한다.

글·사진 윤승일 기자 nagneyoon@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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