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김흥국·현숙·이문세…59년 돼지띠 동갑

돼지띠 가수들의 데뷔음반들 下

등록 : 2019-01-24 14:59

크게 작게

김흥국, 긴 무명끝 ‘59년 왕십리’로 이름 날려

조덕배·임지훈·권인하·김두수 등도 59년생

현진영·유희열·말로는 71년생

1959년 돼지띠 가수 현숙·권인하·조하문(위 왼쪽부터)·이원재·김두수·임지훈(가운데 왼쪽부터)·김목경(아래) 데뷔 시절 사진들.

1959년생 돼지띠 가수로는 김흥국, 현숙, 이문세, 조하문, 조덕배, 임지훈, 권인하, 김두수, 이원재, 김목경 등이 있다. 목사로 변신한 조하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각 장르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중견 가수들이다. ‘효녀 가수’로 유명한 현숙은 어려서부터 동네 노래자랑 대회에서 우승을 독차지했던 꼬마 가수였다. 여고 재학 중이던 1976년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했다. 작곡가 임종수에게 스카우트된 현숙은 자신의 매니저인 선배 가수 김상범의 앨범에 독특한 비음의 ‘끓고 있네’ ‘냉면타령’으로 데뷔해 주목을 받았다.

가수협회장까지 지낸 김흥국은 가장 널리 알려진 1959년생 돼지띠 가수다. 히트곡 ‘59년 왕십리’ 때문이다. 그는 군 제대 후에 밴드 오대장성 드러머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앨범 발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긴 무명의 시간을 감내한 그는 1986년 데뷔곡 ‘창백한 꽃잎’ 등이 수록된 솔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조명을 받지 못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코믹한 이미지에 가려진 김흥국의 감성적인 가창력을 확인할 수 있다.

조하문은 연세대 지질학과 2학년 때 밴드 아스펜스를 결성해 각종 대학가요제에 출전했지만 매번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김수철이 깜짝 스타로 배출된 1979년 제1회 전국 대학가요 경연대회 때는 창작곡 규정을 모르고 외국 곡을 준비해 실격됐다. 그해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서도 2차 예선에서 탈락했다. 결국 3인조 밴드 마그마를 재결성한 조하문은 1980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하드록 ‘해야’를 고음의 샤우팅 창법으로 구사해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대상이 기대되었지만 프로를 능가하는 실력이 오히려 흠이 되어 은상에 머물렀다. 조하문의 데뷔곡 ‘해야’는 <80대학가요제> 2집에 처음 실렸다.

현숙·권인하·조하문·이문세·임지훈(위 왼쪽부터)·조덕배·김두수·이원재·김흥국·김목경(아래 왼쪽부터) 데뷔 음반들.


이문세는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다운타운에서 노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후 1979년에 고 김정호가 운영한 무교동의 라이브 카페 ‘꽃잎’에서 친해진 개그맨 전유성의 주선으로 기독교방송 라디오 <세븐틴>에 이야기 손님으로 출연했다. 입담과 노래 실력을 겸비했던 그는 곧 고정 출연자가 되었고, 양희은의 뒤를 이어 진행자로 기용되었다. 노래에 대한 열망이 컸던 그는 1980년 자작곡 ‘가는 사람 갈지라도’ 등으로 음반을 내고 데뷔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제는 희귀 앨범으로 수집가들이 표적인 1982년 발매한 첫 독집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데뷔 초기의 이문세는 가수보다는 노래하는 방송 진행자로 더 알려졌다.

조덕배는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서정성이 돋보이는 다양한 장르 음악으로 사랑받는 뮤지션이다. 그는 고등학생 때 온종일 화실에서, 방학 때는 서해안 대천과 작약도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만들었다. 1978년 데뷔 음반을 발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LP가 발견된 적은 없다. 정식 발매는 8년 후인 1985년에 이뤄졌다. 지난 사랑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전한 데뷔곡 ‘나의 옛날 이야기’는 지금도 사랑받는 명곡이다.

권인하는 1979년 청주대 캠퍼스 밴드 샐러맨더스(‘도롱뇽’이란 뜻)의 키보디스트로 MBC 대학가요제 본선에 데뷔곡 ‘헤어진 후에’로 진출했다. 그 후 경희대 환경학과에 다시 진학해 동아리 밴드 탈무드에서 활동했다. 그의 이름이 가요계에 알려진 것은 1985년 자작곡인 이광조의 ‘사랑을 잃어버린 나’가 히트하면서부터다. 1986년 밴드 ‘우리’를 결성해 정규 앨범을 발표해 대학가에서 나름 주목받았다.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앨범 제작비에 썼을 정도로 음악 열정이 강했던 권인하는 밴드 해체 후 솔로로 독립했다.

아트 포크 뮤지션 김두수는 1981년 고려대에 입학 후 서울 명동의 PJ살롱, 쉘부르 등에서 통기타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밤업소에서 예명을 요구해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천하의 악당 김두수를 예명으로 삼았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아 킹박에게 오디션을 봤다. 당시는 가수의 얼굴 사진을 크게 배치한 촌스러운 재킷이 유행했다. 제작사는 재킷 이미지로 내정한 윤해남 화백의 추상화를 뒷면으로 옮기고, 김두수의 얼굴 사진을 전면에 배치해 그를 절망시켰다. 음악 외적인 벽에 가로막혀 빛을 보지 못한 1986년 발매된 데뷔 앨범은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서정주의 시를 가사로 사용한 데뷔곡 ‘귀촉도’는 2000년 미당의 장례식 때 조곡으로 사용되었다.

데뷔 전부터 학원가에서 소문난 노래꾼이었던 임지훈은 1982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곡인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의 가사를 작사하며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게 먼저 알렸다. 이후 산울림 김창환이 주도했던 꾸러기들 멤버로 활약했던 그는 솔로 데뷔 이후 개성 있는 가창력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한양대 음대 출신 싱어송라이터 이원재는 1987년 대학 후배 유재하보다 먼저 데뷔 앨범을 발표해 데뷔곡 ‘좋아’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제2의 김민기’로 언더그라운드 판에서 주목받았지만 건강 문제로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기타 연주를 시작한 김목경은 군 복무를 마친 1984년에 녹음 엔지니어 공부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났다. 음악 내공을 기르며 7년간의 영국 유학 생활을 마친 김목경은 1989년 12월 현지에서 녹음한 서구 블루스 음악에 기반을 둔 음원들을 한국에 가져왔다. 이듬해 발표한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은 가요풍의 ‘내가 본 마지막 그녀’였지만, 대중에게 김목경의 이름을 널린 알린 히트곡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다. 이 곡은 김광석이 1995년 리메이크하면서 뒤늦게 빛을 보았다.

김경호의 청소년가요제 경연 모습. 김경호·현진영·언니네이발관 이석원·노이즈가든 윤병주. 1971년생 돼지띠 뮤지션 데뷔 음반 LP 모음.

1971년생 돼지띠 가수로는 현진영, 유희열, 말로, 정단, 윤병주, 현진영, 김경호, 김연우, 언니네이발관 이석원 등이 있다. 한국 비보이 1세대 춤꾼 현진영은 1990년 ‘현진영과 와와’로 데뷔했고, 김경호는 고교생 시절인 1992년 제2회 청소년 창작가요 경연대회에서 자작곡 ‘꿈 그리고 사랑’으로 동상을 받으며 일찌감치 데뷔했다. 나머지 가수들은 대부분 시디(CD)로 데뷔했지만 언니네이발관의 정규 앨범들과 윤병주가 주도한 노이즈가든의 앨범들은 최근 LP로 재발매되었다.

1983년 돼지띠 가수로는 슈퍼주니어 김희철, 테이, 손담비, 임주연 등이 있고 1995년생 돼지띠 가수로는 전 세계에 엄청난 팬덤을 만들며 케이팝의 인기를 주도하고 있는 방탄소년단의 지민, 뷔 등 많은 아이돌 가수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