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 맞춘 ‘짧게 일하기’, 좋은 사람과 ‘길게 일하기’ 되다

다르게 일하는 사람들 ① 짧게 일하는 사람들 - 콘텐츠 기업 ‘진저티프로젝트’의 3인

등록 : 2022-05-1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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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이 각자 원하는 대로 근무시간 제도를 선택할 수 있는 기업 ‘진저티프로젝트’에서 함께 일하는 최예은 매니저(왼쪽부터), 서현선 이사, 강진향 공동대표가 지난 4월19일 서울 서교동 사무실에 모여 월간회의 준비를 하고 있다.

2014년 경력 단절 여성 3명이 뜻 모아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는 조직 만들어

‘짧은 노동=나쁜 노동’ 고정관념에 도전

자신 만들기, 덕후 활동 병행 등 이유로

2.5일·3일·4일제 등 다양한 근무 택해

한 사람이 상황 따라 ‘4일→5일제’ 변화도

“개인 상황 따라 일 줄이고 늘릴 때 있어


조직이 변화 허용 안 하면 튕겨져 나가”

정규직·전일제·장기근속 등 ‘표준 일자리’가 아니어도 행복해질 방법은 없을까? 황세원 일인(in)연구소 대표가 ‘행복한 삶을 위해 다르게 일하는 사람들’을 찾아 소개한다. 황세원 대표는 <국민일보>에서 10여 년간 기자로 일했고 희망제작소, 랩(LAB)2050을 거쳤으며, ‘새로운 노동’을 지향하는 <말랑말랑한 노동을 위하여>를 펴냈다. 월 1회 연재. 편집자

‘주 3일 근무’를 선택적으로 시도한다는 한 대기업 소식이 한동안 화제였다. ‘주 4일 근무’를 내세우는 어느 기업의 광고도 자주 눈에 띈다. 지난 대선 기간에는 ‘주 4일 노동제’가 공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짧은 노동’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주 최대 52시간’이라는 법적 제한조차 없애고 긴 노동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된다. 사실 그보다 더 우리 발목을 붙잡는 것은 ‘짧은 노동은 대체로 나쁜 노동’이라는 고정관념이다. ‘파트타임’ ‘알바’라는 이름으로, 마치 제대로 된 노동이 아닌 것처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짧게 일하기를 선택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해도 걱정 없이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그런 가운데 이미 짧게 일하기를 선택해온 사람들, 스스로 그런 일자리를 만들고 실험해온 사람들이 있다. 그 선택 이유를 듣다 보면 진짜 ‘나쁜 노동’이라는 게 뭘까, 좋은 삶을 살게 해주는 ‘좋은 노동’이라는 건 뭘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조직문화 컨설팅, 교육·출판 기업인 ‘진저티프로젝트’(이하 진저티)의 마포구 서교동 사무실에서 4월19일 세 사람을 만났다. 서현선(45)·강진향(36)·최예은(25)씨가 그들이다. 세 여성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짧게 일하기’를 경험했거나 지금 하고 있어서이다. 만나고 보니 각기 엑스(X)세대, 밀레니얼세대, 제트(Z)세대에 속하는 세 사람의 조합이기도 했다.

진저티는 2014년 출산과 육아로 경력단절을 경험한 ‘고경력’ 여성 세 명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기업으로, 처음부터 각자 사정에 맞는 만큼 일할 수 있는 형태의 조직이었다. ‘엔(N)잡러’라는 신조어가 여기서 탄생했다. 지금은 다른 조직에서 일하는 홍진아씨는 주 3일은 진저티에서, 나머지 2일은 다른 조직에서 일했고 2017년부터 1년여 동안의 그 경험에 ‘N잡러’라는 이름을 붙여 소개하는 글을 써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설립자 중 한 명으로 한동안 공동대표였다가 지금은 이사직을 맡은 서현선씨는 초기 2년 동안은 ‘주 4일’로 일했고, 한동안 ‘주 2.5일’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 공동대표를 맡은 강진향씨는 2017년 입사해서 1년여 동안 ‘주 4일’을 경험했다. 올해 초 입사한 최예은씨는 ‘주 3일’을 선택했다. 경남 밀양에서 지내면서 사흘은 원격근무로 진저티 일을 하고 나머지 이틀은 농사짓는다. 서울에는 전체 회의를 위해 매달 한 번만 올라온다.

경남 밀양에 살면서 진저티프로젝트에서 주 3일 원격근무로 일하는 최예은씨가 나머지 2일 동안을 활용해 농사짓는 모습.

각각의 선택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현선씨는 “처음 저를 비롯한 세 경력단절 여성이 이 조직을 만들었을 때는 이런 형태가 아니면 일을 다시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다”고 했다. 파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직 실험도 그런 절박함 때문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밀레니얼세대 진향씨의 선택은 좀 더 능동적이다. “저는 ‘덕후’ 기질이 강하거든요. 이런저런 콘텐츠에 푹 빠지기도 하고, 팬질도 했다 하면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이전에 일했던 두 직장에서는 이런 성향과 일이 조화를 이루기 어렵더라고요.”

진향씨는 진저티에 들어오면서 ‘주 4일’을 선택했더니 금요일 하루를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1년여 뒤 ‘주 5일’로 근무제를 바꾼 데 대해서는 “진저티에서의 콘텐츠 기획 업무에 덕후 기질을 녹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인데다가 “경제적 필요”라는 이유가 함께 작용했다고 한다.

한때 진저티에는 ‘주 3일’ 근무가 대세를 이뤘지만 현선씨와 진향씨를 비롯한 구성원 대부분이 현재는 ‘주 5일’을 선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현선씨는 “사람마다 일을 줄여야 할 때가 있고 경제적 필요 등에 따라서 늘려야 할 때가 있다”며 “조직이 이런 변화를 허용해주지 않으면 결국 사람이 튕겨 나가게 된다”고 했다. 좋은 사람들을 계속 일하게 하려면 조직이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올해 초 예은씨가 입사하면서 다시 ‘주 3일’ 근무자가 생겼다. 이 결정이 특별한 것은 진저티 구성원들과 예은씨가 상의해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저티는 2020년 부산 영도에서 ‘청년 생태보고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예은씨와 인연을 맺었다. “어려서부터 뭐든지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는 예은씨는 중학교 때부터 요리를 했고, 진저티를 만났을 당시 영도에서 친구들과 퓨전 형식 독립서점을 공동 운영하면서 푸드 매니저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후로 진저티가 하는 행사에서 케이터링을 맡는 등으로 협업하던 예은씨는 코로나19로 서점 문을 닫은 뒤 정식으로 진저티 입사 제안을 받았다.

진향씨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예은씨가 진저티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했지만, 자유롭게 일해온 방식과 조직 생활이 맞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에 ‘주 3일’ 근무를 제안하자 예은씨는 선뜻 동의했다. 나머지 이틀간 밀양에서 농사짓기로 한 것은 직접 재배한 작물과 요리를 결합해서 또 다른 뭔가를 만들어보려는 실험을 위해서다.

“안정성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실험도 재미있는 법이잖아요?”라며 만족감을 표하는 예은씨에게 일하는 시간이 짧은 만큼 월급이 적은 단점도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제 또래 중에는 적게 벌더라도 자유가 더 보장되는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답이 돌아왔다.

경력을 이어가기 위한 절박함에서, ‘덕후’의 활동과 일을 병행하기 위해서, 또는 막연하더라도 자기만의 ‘뭔가’를 만들어가기 위한 실험으로. 세 여성이 ‘짧게 일하기’를 선택한 이유는 각기 달랐다. 각자의 세대와 시대적 배경이 반영된 선택 같기도 했다.

최씨(오른쪽)가 지난 4월19일 월간회의를 위해 서울 서교동 사무실에서 동료인 서현선 이사(가운데), 강진향 공동대표와 회의를 하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시간이 더 필요하다. 꼭 육아만이 아니더라도 돌봄에 시간을 써야 하는 상황은 사실 누구에게나 생긴다.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후회가 없는 한국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도 우리는 ‘경력단절’ 현상만으로 다 표현이 안 되는 돌봄의 문제를 의식하지 못한 채로 살고 있다.

또는 그냥 시간을 다른 데 더 쓰고 싶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살고 싶은 삶의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짧게 일하기’를 선택한 사람들, 그들과 최대한 길게 일하기 위해서 고정된 틀을 과감히 내려놓은 조직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알려준다. 아무리 모두가 선망하는 일자리라 해도, 정규직·전일제·장기근속의 ‘표준 일자리’에 우리의 삶을 다 욱여넣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글·사진 황세원 일인(in)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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