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홀몸어르신에 배달된 우유, 안부 확인의 온정

‘1200명에게 날마다 우유배달’ 고독사 뒤 방치 막으려는 노력

등록 : 2017-11-23 14:31 수정 : 2017-11-23 17:40

크게 작게

사단법인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은 홀몸어르신에게 무료로 우유를 전해드리며, 어르신들이 집에서 홀로 숨을 거둔 뒤 방치되는 일을 막기 위해 애쓴다.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 제공

서울 성동구 금호동과 옥수동을 잇는 옥수터널 위의 독서당로 동네. 산 아래서 얼핏 보면 아파트 숲에 가려져 있지만, 동네에 오르니 1960~70년대부터 이어져온 달동네 모습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꼬불꼬불한 골목과 계단이 많아 ‘도둑이 여기까지만 도망오면 오토바이로 쫓아온 경찰에 잡히지 않았다’던 우스갯말이 실감 난다.

올해로 80살인 박인애 할머니는 이곳 다세대주택의 지하 집에서 8년째 산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의 좁은 공간이다. 2013년 사별하기 전까진 할아버지가 곁에 있었지만, 그 뒤론 쓸쓸한 ‘나홀로’의 삶이다. 기초생활보장 대상자여서 동주민센터가 주는 28만원 등 70만원에 조금 못 미치는 지원금으로 한달 생계를 꾸린다.

“많이 적적하지. 얼마 전 부산인가 성남인가에서 노인이 고독사했다는 얘기를 텔레비전으로 보고, 나도 저런 신세가 될까 생각을 많이 했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그런 박 할머니에게 아침마다 배달되는 우유는 이웃과 연결되는 소중한 ‘끈’이다. 우유가 배달함에 두개만 쌓여도 배달원이 곧바로 사단법인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www.milk1009.org)에 연락을 하기 때문이다. 이 법인은 박 할머니가 마음 편하게 우유를 먹을 수 있도록 지난해 봄부터 우윳값을 대고 있다.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의 호용한(60) 이사장(옥수중앙교회 목사)은 “외로운 홀몸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고나서까지 방치되는 것은 또 다른 아픔”이라며 “우유배달을 통해 홀몸어르신의 안부를 확인하는 작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독사를 막으려는 우유배달의 출발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교회에 부임한 지 2년째였던 그해, 호 이사장은 지인의 후원을 받아 옥수동 일대 홀몸 어르신 100명에게 우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달동네를 오르내리느라 골다공증 등으로 고생하는 어르신들에게 칼슘우유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호 이사장은 “등이 굽고 초라한 차림으로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을 볼 때면 끼니나 제대로 챙겨 드시는지 염려됐다. 그때만 해도 고독사와 우유배달의 연계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유배달의 ‘진화’는 2007년 이뤄졌다. 그 무렵 유독 고독사가 많아서 사회문제가 됐고, 호 이사장은 우유배달이 고독사를 막는 한 방편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우유업체에 두 가지를 요청했다. 아침마다 신선한 우유를 배달할 것, 우유가 두개 이상 쌓여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일 수 있으니 교회로 꼭 연락해달라는 것. 그리고 이런 활동을 ‘고독사 방지를 위한 사랑의 우유배달’이라 이름 지었다.


호 이사장의 돌봄이 알려지면서 도움의 손길이 늘어났고, 2015년 12월 사단법인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이 창립됐다. 우유배달의 범위를 넓히고, 재정을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다. 법인에는 배달의민족, 매일유업, 건국유업, 러쉬코리아, 텐마인즈, 제이준 성형외과, 열심히 커뮤니케이션즈, 죠스푸드 등 10개가 넘는 기업이 힘을 보태고 있다. 개인 후원자도 100명이 넘는다.

호용한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 이사장이 홀로 사는 박인애 할머니를 찾아가 안부를 살피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오랜 후원자로 법인 이사도 맡고 있는 김봉진 배달의민족 대표는 지난달 사재 1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계획을 내놓으며, 그 가운데 상당액을 우유배달에 쓰겠다고 밝혔다. 또 강북삼성병원은 내년부터 법인의 추천을 받아 우유를 받는 어르신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강북삼성병원 관계자는 “사회공헌 활동 차원에서 어르신들이 녹내장, 뇌 질환, 심장질환 등에 대한 검진과 치료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면으로 이어짐

성동구에서 출발한 우유배달은 사단법인 설립 뒤 대상자가 많이 늘어나 현재(10월 말 기준) 서울 시내 9개구에서 1218명에 이른다. 성동구가 206명으로 가장 많고 동대문구 166명, 강북구 151명, 광진구 150명, 은평구 142명, 성북구 134명, 노원구 128명, 금천구 122명, 관악구 19명 등이다. 월 2500만원이 조금 넘는 비용이다. 우유 받을 분은 구청의 복지 업무 담당자에게 소개받는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베푸는 일인 것만은 아니다. 우유배달을 통해 거꾸로 나눔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호 이사장은 “여러 해 우유를 보내줘서 고맙다며 아이들에게 주라고 방울모자 100개를 손수 뜨개질해 보내준 할머니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우유배달을 하면서 호 이사장은 한해에 5명가량의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는 걸 경험한다고 했다. 겨울철인 12월에서 2월 사이에 숨지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남성인 게 특징이란다. 호 이사장은 “혼자 살아도 할머니들은 떨어져 있는 자녀나 이웃과 교류가 상대적으로 많아 우유배달원의 연락으로 숨진 사실을 확인하는 사례가 드물다”고 전했다. 고독사가 확인되면 구청에서 다른 곳에 사는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연고자가 없어 쓸쓸하게 장례를 치르는 일도 있다고 한다.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의 노력은 지난달 ‘2017 서울시 봉사상’의 최고 영예인 대상을 받으며 빛을 발했다. 서울시는 사랑의 우유 나눔이 성동구뿐 아니라 서울의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희망과 나눔의 씨앗이 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호 이사장은 “달동네의 작은 시작이 많은 분의 도움으로 큰 결실을 보게 돼 너무 감사할 뿐”이라고 밝혔다.

이제 호 이사장은 고독사를 막는 우유배달이 서울시 전체로 확대되기를 꿈꾸고 있다. 한 구에서 150명 안팎의 홀몸어르신에게 우유를 배달하려면 연간 10억원 정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좀더 욕심을 내 북한 아이들에게 우유를 배달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고 있다. 호 이사장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으로, 당시 황해도 은율에 세 아이를 남겨두었다고 한다.

“우리보다 더 힘들고 추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북한 아이들에게 우유가 전해진다면 얼마나 고맙고 따뜻할까요?”

정재권 선임기자 jjk@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