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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 아버지 인생 폐소방호스 가방에 담다

이규동 파이어마커스 대표

등록 : 2017-10-1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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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동 ‘파이어마커스’ 대표가 가방 등으로 새활용되는 폐소방호스를 보여주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름 65㎜(또는100㎜), 평균 길이 15m, 겉면 폴리에스테르, 안면 폴리우레탄.

보통 6개월에서 1년쯤 쓰고 버리는 소방호스 이야기다. 이 기간 소방호스는 소방관의 손에 들려 화마와 싸운 뒤 폐기물처리업체를 거치며 통째로 버려진다. 미세한 구멍만 생겨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소방호스의 이런 ‘운명’은 이규동(29) 파이어마커스 대표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이 대표는 2014년 ‘소방의 흔적이 있는 제품들’ ‘소방의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파이어마커스’(Fire Markers)를 차리고, 폐소방호스를 이용해 가방 등을 생산한다. 서울의 10여개 소방서와 경기도 안산, 광주, 이천 등의 소방서에서 폐소방호스를 모아 씻고 잘라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지난해에만 1000여개의 소방호스가 새활용(업사이클)됐다고 한다.

이 대표와 소방호스의 만남은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는 소방관이 되고 싶어 호서대 소방방재학과를 다녔다. 현역 소방관인 아버지 이인희(56)씨의 영향이 컸다. 30년 가까이 소방관으로 일해온 아버지는 현재 경기도 광주소방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대표는 “화재 현장에서 소방호스에 꼬리뼈를 다쳐 금이 가고 ‘외상후 스트레스’도 겪으셨지만, 늘 시민의 안전을 지키려 애쓰는 아버지를 닮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이 대표의 꿈에 변화가 온 건 대학 4학년 때 창업동아리에 가입하면서부터다. 그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쓴 책 <세상을 바꾸는 천 개의 직업>을 통해 영국 새활용 기업 ‘엘비스 앤 크레스’(Elvis & Kresse)를 알게 됐다. 이곳은 영국소방청에서 폐소방호스를 공급받아 가방·벨트 등을 만드는 회사로, 수익금의 일부를 소방관을 위해 기부한다.

이 대표는 ‘엘비스 앤 크레스’를 모델로 삼고 호서대 창업대학원에 진학했고,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으로부터 2500만원을 지원받아 파이어마커스를 차렸다. 서울교대 근처 오피스텔에서 시작해 경기도 광주의 컨테이너, 서울혁신파크 등을 거쳐 지금은 서울 성동구 서울새활용플라자에 업무 공간이 생겼다. 소방관이 되진 못했지만, 아버지의 인생을 새활용 제품에 담고 있는 셈이다.

제품은 회사 누리집과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로 판다.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해 선주문 후제작 방식으로 손님을 확보하기도 한다. 지난해까진 가방 제작에 주력했지만, 올해부턴 해먹, 야외용 매트, 전등, 의자, 벽걸이 메모장 등 제품 다양화에 힘을 쏟고 있다. ‘엘비스 앤 크레스’와 협업하며 사업 영역을 넓히고, 소방청과 계약을 맺어 안정적으로 많은 양의 폐소방호스를 공급받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엘비스 앤 크레스’처럼 소방관을 위한 기부에도 마음을 쓴다. 일부 수익금으로 한 켤레에 7만원쯤 하는 소방장갑을 사들여 소방관들에게 보낸다. 지난해엔 90여개의 소방장갑이 소방관들의 손에 전해졌다. 이 대표는 “장갑의 교체 주기가 보통 3년인데, 그 전에 닳아지면 소방관 개인 돈으로 사는 경우가 많아 소방장갑을 기부하고 있다. 장갑을 받은 분들이 인증 사진이나 감사 메시지를 보내올 때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바람은 파이어마커스가 패션 제품 차원을 넘어 ‘안전’을 모토로 한 전문 상표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는 “소방관의 안전이 시민의 안전이고, 시민의 안전이 소방관의 안전이라고 생각한다”며 “생활안전을 위한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어 우리 사회가 좀 더 안전한 곳이 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서울새활용플라자 2층의 전시관에 가면 파이어마커스가 만드는 의자와 매트 등을 만날 수 있다.

정재권 선임기자 jjk@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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