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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용 못 빼돌리고 품삯 받고 땡땡이… 경복궁 중건 모습 “지금과 똑같아”

서울편찬원,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 펴내…1860년대 서울 사회상 이해 자료

등록 : 2020-01-16 14:48
각 부문 전문가 참여…15개 일화 소개

‘밥값 받고 줄행랑’ 놓은 함바집도 소개

청기와 비싸서 포기…재정 상황 드러나

병인양요로 자재 공급 못해 공사 중단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경복궁에는 기울어가는 왕조를 되살리려는 당대 집권층의 바람과 함께 3년여에 걸친 대역사에 동원된 당시 조선 민중의 애환도 담겨 있다. 그 이모저모를 상세히 기록한 일기가 <경복궁영건일기>다. 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에서 발굴돼 지난해 번역 출간된 <경복궁영건일기>(배우성 등 역, 서울역사편찬원 펴냄)는 흥선대원군 주도로 조선 고종 대에 이뤄진 경복궁 중건 공사(1865년 4월~1868년 7월) 과정에 대한 세밀한 기록으로 공사 관련은 물론 당시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최근 서울역사편찬원은 이 귀중한 사료를 일반 시민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주요 내용을 간추려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이란 제목으로 펴냈다. 이강근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 등 건축·역사·미술사·국문학 등 분야의 전문학자들이 집필진으로 참여해 15개 주제로 당시 경복궁 중건을 둘러싸고 이모저모를 소개했다. 책의 원본인 <경복궁영건일기>는 경복궁 공사에 관한 조선 정부의 공식 기록으로, 경복궁 중건을 위해 설치된 영건도감의 중간급 관리인 원세철(1817~?)이 편찬을 주관했다.

경복궁 중건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었음에도 정치·경제·사회사적 측면에서 분석되었을 뿐 관련 기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구체적인 실상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역 <경복궁영건일기>와 그 축약본 형태의 <…천일의 기록>이 잇따라 나옴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 잘 알 수 없었던 경복궁 중건 현장 상황, 당시 서울의 모습과 생활 등 조선 후기 사회상을 비교적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종의 ‘미시사’로서 당시 민중의 삶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다.

오늘날 경복궁 전경.


그때나 지금이나…변함없는 부정행위들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에 수록된 15개의 일화는 “경복궁 중건 현장의 미시적인 접근이자,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새로운 역사”이다. 경복궁의 건축적 특징을 비롯해 중건 자금을 모으기 위해 발행한 원납전과 인력 동원의 실상, 각종 부정행위, 공사 현장의 노동자·장인·관리자의 움직임, 왕궁 중건의 당위성과 공사 독려의 허실을 함께 보여주는 노래, 첨단 기술과 공법의 사용, 기원과 열망을 담은 상량과 각종 상징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경복궁 중건 공사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행위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규모 토목 공사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기술자들의 일탈 행위, 자재 조달 부정, 중간에 끼어든 지방 관아의 각종 농간과 토색질, 원납전과 당백전으로 인한 사회문제, 환표를 비롯한 금융 사기 사건 등이 빈발했다. 공사 현장에서 각종 부정행위가 벌어지고 적발된다. 공사에 쓸 못을 몰래 빼돌리다가 적발된 석수, 품삯만 받고 땡땡이친 일꾼들, 겨울 부실공사로 무너진 담장 등…. 요즘도 가끔 공사 현장에서 발생하는 ‘함바집 비리’도 있었다. 일꾼들에게 밥을 파는 밥집 주인이 밥값을 미리 받아 챙기고 줄행랑친 것. 지방에서는 하급 관리들이 영건에 쓸 거라고 사칭하고 토색질하거나 상납할 물건들을 밀매하거나 재료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지나가는 배를 무작정 붙잡아놓고 뇌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청기와 경복궁’

조선 정부는 경복궁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전각 지붕을 청기와로 하려고 계획했으나 자금·기술 부족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청기와는 조선 초 경복궁을 창건할 때 근정전과 사정전에 사용한 특별한 기와였으나, 그 제작 기술 전수가 끊긴 상황에서 이를 복원하는 데 막대한 재원이 든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제작 기술로는 청기와 한 장당 8냥의 비용이 산출되었다고 한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주변 민가를 철거할 때 보상비가 기와집 한 칸당 10냥, 초가집 한 칸당 5냥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공사장 인부들에게 소 4마리를 사서 잔치를 열어준 데 든 비용은 700냥. 따라서 청기와 한 장 값으로 기와집 한 칸 또는 초가집 두 칸, 청기와 20장이면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다.


병인양요와 공사 중단

당시 발생한 병인양요도 경복궁 중건 공사를 방해했다. 궁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1866년 8~10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자 조정에서 공사 중단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고종은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나 강화도에서 서울로 오는 뱃길이 막혀 전쟁이 지속하는 동안에는 목재 수송이 끊어졌다. 중건 현장에서 군대가 맡은 작업은 확전 대비 때문에 모두 중단됐다. 이밖에 석재 채취, 수레 제작용 목재 수급, 철물 확보 등의 작업도 병인양요 기간에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고 한다. 애초 완공 목표일은 1867년 10월30일이었으나 고종이 최종적으로 이어한 것은 1868년 7월2일이었다.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서울편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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