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빵, 하루 10종류 이상 정신없이 배웠다

매웠던 첫 주 제빵 수업

등록 : 2019-04-18 15:17 수정 : 2019-04-19 13:57
월~목요일 동시다발적 제빵 수업한 뒤

금요일 제빵 시험에 떨어질까 걱정

“1주 만에 이탈리아 빵 배울 수 없어”

친구가 해준 말 깨닫고 마음 비우자

복잡한 레시피 정리한 외국인 도움

식전 빵 ‘보콘치니’ 시험 무사통과

내가 구운 빵 구내식당에 제공돼

나는 요리라는 효모 품은 밀가루지만


“발효되려면 시간이 필요함” 깨달아

내가 만든 ‘보콘치니’. 시험 과제로 나온 보콘치니 인테그랄리. 통밀로 만든 식전 빵이다.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의 첫 수업은 제빵이었다. 그런데 나는 제빵에 관심이 없었다. 빵이 맛도 있고 재미는 있지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기 때문에 아예 관심을 안 가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계기는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빵집 하는 고교 동창에게 있다. 그는 회사에서 보내준 미국 경영전문대학원(MBA) 연수 도중에 제빵에 재미를 붙여 그길로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요리학교에 제빵 유학을 갔다 왔다. 천연 발효종을 이용하는 덕분에 친구의 빵 맛은 기가 막히다.

하지만 그는 날마다 새벽 6시에 출근하고 주말에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국외 여행은 꿈도 못 꾸고 국내 여행을 갈 때도 발효종을 아이스박스에 넣어 들고 다닐 정도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그런 수도자 같은 작업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빵은 내게 그저 “신 포도”에 불과했다.

이탈리아 빵, 종류가 이렇게 많았어?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일주일의 제빵 과정은 신 포도가 아니라 이탈리아 고추 페페론치니만큼이나 매웠다. 첫날 받은 교재에는 34개의 빵 제조법이 있었다. 레시피는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었다. 나는 교재에 있는 빵을 다 만들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에 두세 개 만들고 일주일에 10개쯤 하겠지 짐작했다.

통닭 모양 빵. ‘만토바나’라는 빵이다. 마치 토우를 보는 것 같다.

돼지기름이 들어가는 ‘티젤라’. 따뜻할 때 먹으면 위로가 되는 맛이다.

이탈리아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 동안, 책자에도 없는 빵 10여 종류를 포함해 40가지 이상 빵을 만들었다. 빵 위에 얹는 재료를 바꾼 것까지 합친다면 빵 종류는 훨씬 더 늘어난다. 금요일에 시험을 봤기 때문에 빵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만들었다. 그러니 나를 비롯한 동기들은 하루에 10가지 넘는 빵을 만든 셈이다.

파스타처럼 이탈리아에 빵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국에 알려진 포카치아·치아바타쯤을 예상했는데, 지역별로 반죽별로 재료별로 정말 형형색색의 빵이 있었다. 심지어 뱀·통닭·거북이를 닮은 빵도 있었다. 마치 토우(흙으로 사람이나 동물 모양을 빚어 구운 것)를 보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버터나 오일은 물론이고 돼지기름·감자·허브·올리브 등 빵에 다양한 재료를 썼다. 제빵 셰프인 다비데가 이런 복잡한 제조법을 거의 외우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다. 그는 어떤 질문이나 난관에도 막힘이 없었다. 39살인 그는 매우 직관적이고 창의적이었다.

감자를 넣어서 부드러운 ‘풀리야 포카치아’.

올리브와 비트를 넣은 빵들. 색깔과 향기가 근사하다.

그러나 부지런한 천재는 보통 사람에게는 벅찬 법이다. 사흘 동안 이탈리아의 맑은 공기로 충전된 내 체력은 금세 바닥이 났다. 나를 가장 지치게 한 것은 수업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돼 도무지 제조법을 정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어가 능하지 않으니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궁금증을 셰프에게 하나하나 확인하기 힘들었다. 무지는 공포로 이어졌다. 이러다가는 금요일 시험에 떨어지고 결국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들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빵을 굽는 그 동창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안부만 묻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때 그 친구가 떠나기 전에 “빵을 일주일 만에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냥 이탈리아 빵 문화를 맛보는 것쯤으로 편하게 생각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당시에는 그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는데 전화를 끊고 나니 그 선문답 같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느긋하게 이탈리아 빵을 즐겨보자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또 걸었다.

신기하게도 마음을 비우자 구원의 손길이 밀려왔다. 제빵 코스에는 나를 포함한 한국인 5명 외에도 5명의 외국인이 있었다. 그중에 이탈리아어가 모국어인 외국인이 2명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에 사는 브루노는 사업가인데, 맥주에 ‘꽂혀서’ 취미로 맥주를 만들고 있는 ‘꽃중년’이었다. 50대 중반인 그는 빵이 맥주와 함께 대표적인 발효의 산물인 만큼 두 가지를 모두 배우고 싶어 이 학교를 찾았다고 했다.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온 알레시아는 요리사였고, 현재 근무 중인 레스토랑의 지원으로 제빵 과정에 등록했다. 20대 후반 여성인 그는 학교에서 빵을 만들 때는 군인처럼 무뚝뚝했지만 쉬는 시간에는 활력이 넘쳤다.

두 사람은 이 복잡한 제조법을 각자 전부 정리하고 있었다. 이해 안 되는 게 있으면 수업 끝나고 셰프를 찾아가 하나하나 물어보는 열정도 가지고 있었다. 알레시아는 날마다 밤을 새운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들은 힘들게 정리한 제조법을 친절하게도 동기들에게 공유해주었다.

한국인 동기도 수업시간에 자기가 찍은 사진이나 제조법을 건네줬다. 이렇게 제조법을 확보하자 안심이 됐다. ‘동기 사랑이 나라 사랑’이라는 말이 이탈리아에서 통할 줄이야! 거기다 날마다 하루에 10여 가지의 빵을 만들다보니 수요일쯤 되자 제빵이 아주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 말처럼 이탈리아만의 독특한 빵 문화를 음미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빵 과정을 함께했던 외국인 동기들. 맨 왼쪽이 브루노이고 왼쪽에서 네 번째 여성이 알레시아다. 왼쪽에서 두번째는 제빵과장 셰프 다비데.

밀가루, 열정이 있어야 빵이 된다

드디어 금요일, 시험이었다. 목요일 제비뽑기를 해서 나온 빵을 구워 제출하면 제빵 전문가·기자 등 외부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매겼다. 내가 제출해야 할 빵은 ‘보콘치니 인테그랄리’였다. ‘보콘치니’는 한 입 거리란 뜻이고 ‘인테그랄리’는 통밀가루란 뜻이다. 긴 막대기 같은 ‘그리시니’와 함께 주로 식전에 먹는 빵이다. 작은 빵이기 때문에 제조법에 나온 반죽이나 성형에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이탈리아 사람인 심사위원들에게 이탈리아어로 더듬더듬 설명하는 일이 더 어려웠다. 나를 비롯해 동기 전원이 무사히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기숙사에 돌아와서 신나게 ‘쫑파티’를 했다. 브루노는 자기가 만든 다양한 맥주를 가져왔고 한국 학생들은 삼겹살을 준비했다. 학교 근처의 멋진 와이너리도 들렀다. 지옥과 천국을 모두 맛본 한 주였다.

내가 만든 보콘치니는 학교 냉동고에 보관됐다가 구내식당에서 식전 빵으로 여러 차례 제공됐다. 그 빵을 보면 뜨거운 오븐 앞에서 보낸 나의 이탈리아 첫 주가 떠올랐다. 밀가루는 발효가 되고 누군가의 열정을 거쳐야 비로소 빵이 된다. 발효가 되기 전까지 밀가루는 그저 밀가루일 뿐이다. 나는 쉰이 돼서야 ‘요리’라는 효모를 품고 자신에게 물을 끼얹은 늦깎이 밀가루였고, 발효가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느릿느릿 시간이 걸리더라도 멋지게 발효되고 싶다.

글·사진 권은중 <독학 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