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64년 만에 은행나무 추억을 찾아온 테일러의 아들

종로구 딜쿠샤 下

등록 : 2019-03-07 14:46 수정 : 2019-03-07 14:56
500년 묵은 장대한 은행나무에 반해

테일러 부부 1923년 딜쿠샤 건축

아들 은행나무 근거로 딜쿠샤 찾아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보낸

메일 한 통 근거로 딜쿠샤 찾아내

테일러 부인의 조선 체류기 덕분에

딜쿠샤 이야기 세상에 전해져

애국지사 김상언 활동도 알려져


해방 직전까지 투옥돼 곧바로 숨져

딜쿠샤를 지은 앨버트와 메리부부가 1942년 뉴욕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

종로구 행촌동 1-88 딜쿠샤를 찾아 다시 한번 길을 떠난다. 딜쿠샤는 3·1만세 사건을 타전한 미국 AP통신사의 임시통신원이 살던 집이라는 정치사회적인 함의나,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 도원수의 집터였다는 역사적 사실보다, 한양도성 인왕산 성곽을 배경으로 묵묵히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내뿜는 향기가 더 짙은 곳이다.

딜쿠샤와 관련된 기억과 기록의 대부분은 500살 묵은 장대한 은행나무와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가 1923년 이곳에 집을 지은 이유는 ‘첫눈에’ 은행나무에 반해서였다.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64년 만에 이 집에 돌아오게 된 이유도 은행나무 아래서 보낸 유년 시절 추억 찾기였고, 결국 은행나무를 단서로 딜쿠샤를 찾았다. 현재 딜쿠샤와 은행나무는 별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지만 본래 한 몸, 한 땅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더라도 딜쿠샤는 늘 은행나무의 너른 품속에 안겨 있다.

메리 테일러가 저술한, 1992년 사후 출간된 조선 체류기 <호박목걸이>에 따르면 부부는 우연히 발견한 이 터를 ‘은행나무 땅’이라고 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 집을 지을 때 은행나무를 신성시하는 주민들과 불화를 겪었다. 결국 담장을 쌓지 않고 터 내 우물을 개방하면서 갈등을 풀었다.

이 은행나무는 행촌동이라는 지명을 낳았다. “신목(神木)이어서 나무에 올라가는 사람은 괴질을 앓거나 변사하며 평상시에는 열매를 맺지 않지만 나라에 이변이 생길 때에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 사전에 예고해준다는 설이 있다”라고 종로문화원이 발간한 <종로의 역사·문화유산> 행촌동 편에 전한다. 서울 도심의 나무 중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위엄 있고 아름답다. 한때 사직터널과 인왕산 사이 도시 공간에서 시야를 가리는 사물은 은행나무와 딜쿠샤뿐일 때도 있었다.

우물도 주민들이 딜쿠샤 건립에 반대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인왕산에서 스민 우물 때문에 골우물골, 어수우물골로 유명했다. 나중에 우물 이름을 따서 자연부락이 형성됐다. 물맛이 좋아 나라에서 사용했다는 연유로 어수정동(御水井洞)이라는 지명까지 붙었다.

은행나무가 딜쿠샤를 찾아준 사연은 이렇다. 2005년 한국영화제작자협회 회원인 김익상 서일대 방송영화학과 교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으로부터 전자우편 한 통을 받았다. “일제 치하 서울에 거주한 미국 노인이 당시 가족들과 살았던 집을 찾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브루스와 영화업계에서 일하는 딸 제니퍼 테일러는 한국에서 4대째 이어지는 테일러 가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브루스의 집에 대한 기억은 ‘임진왜란 때 장군이 심은 은행나무 옆집’이 전부였다. 김 교수는 당연히 이순신 장군을 지칭하는 줄 알고 충무로와 필동 일대를 뒤졌지만 허탕을 쳤다가 뒤늦게야 행촌동에서 권율 장군의 은행나무를 찾았다. 200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260㎞ 떨어진 소도시 멘도시노에서 서울을 찾은 브루스는 은행나무만 한없이 바라봤다.

브루스 덕분에 세상으로 나온 딜쿠샤의 ‘비밀의 문’을 활짝 열어준 이는 브루스의 어머니 메리 테일러였다. 영국 출신 연극배우였던 메리는 다재다능한 작가이자 화가였다. 메리가 남긴 책과 자료가 없었다면, 1919년 3월1일 하루 전날인 2월28일, 세브란스병원 신생아실 브루스의 이불 아래에 숨겨놓은 독립선언서 이야기와 브루스의 삼촌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간 뒤 작성된 3·1 만세 특종 기사 비화는 그대로 묻혔을 것이다.

또 메리가 남긴 그림 덕분에 오늘 우리는 ‘김 주사’라는 익명의 애국지사를 발굴했다. 메리가 1942년 추방당하기 직전 가택 연금 중에 그린 14명의 조선 사람 중 ‘김 주사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김 주사는 바로 김상언이다. 주사란 관직명이며 김상언은 고종 때 역관으로 활동한 사실이 사료 조사로 확인됐다. 또 대한제국 시기 주미공사관 수습생으로 일한 기록도 있다. 나라가 망한 뒤 테일러 형제가 운영하는 테일러 상회와 집안일을 돌보는 집사로 일했다. 영어에 능통한 그는 테일러 일가에게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면서 틈날 때마다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딜쿠샤를 지을 때 중재자 몫도 맡았다. ‘돈 잘 버는’ 광산업자 앨버트가 ‘지원한 것은 아니지만’ 통신사의 통신원을 맡아 조선의 독립운동을 보도하도록 의식화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호박목걸이>에는 “(앨버트의 동생 월리엄이 김 주사를 나에게 소개하면서) 김 주사는 한국 역사에 정통한 학자이자 열렬한 애국자일 뿐만 아니라 서양적인 사고방식에도 아주 익숙해요. 이만한 스승님을 찾기는 힘들걸요.” “어느 날 가게(테일러 상회)를 찾아간 나에게 (김 주사는) 단군 신화를 비롯해 조선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면서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단군이 돌아와서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가져왔으면 하고 바란답니다.’” “(김 주사는) 이곳을 막아버리면 당장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이 땅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던 곳이었답니다. 마을 사람 누구나 (은행)나무를 보러 오고 이곳의 우물을 이용했습니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테일러 가문 1대 조지 테일러(오른쪽)와 2대 앨버트 테일러의 묘비가 나란히 서있다. 앨버트는 숨지기전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 세월이 한참 흘러 1948년 앨버트의 유해를 안고 돌아온 한국에서 메리는 김 주사가 해방 직전까지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옥사 직전에 풀려났다는 사실과 함께, 방송국에서 일하던 그의 큰아들은 일제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 주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체포되기 전까지 천장에 태극기를 숨겨놓았다고 한다”라는 대목도 등장한다. (딜쿠샤의) 천장에 숨겨놓았던 태극기는 김 주사의 유일한 유품이다. 테일러 가문 4대 제니퍼가 기증한 유물, 자료와 함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앨버트의 3·1 만세 사건 기사가 보도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동생 윌리엄 테일러의 행적과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앨버트보다 5살 아래인 윌리엄은 형과 테일러 상회를 공동 운영했으며, 테일러 부부가 한국에 왔을 때 서대문에 신혼집을 마련해줬다. 또 앨버트의 유해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도록 도움을 줬다.

윌리엄은 경성부 태평통 2정목에 테일러 상회를 세우고, 영화를 배급하거나 크라이슬러 자동차와 쉐보레 화물차, 축음기, 타자기 등을 팔았다. 조선호텔 앞 소공동에 빌딩 3채를 가진 재력가였다. 조선에 자동차와 영화를 최초로 보급한 인물로도 알려졌다. 윌리엄의 생몰 연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장사 수완이 뛰어나 테일러 상회를 꾸려 형과 동업 관계를 유지하거나 별도의 사업체를 운영했다. 윌리엄은 해방 후 중국에서 돌아와 한동안 딜쿠샤와 테일러 상회를 관리했으나 집을 팔고 한국을 떠난 뒤 행적이 묘연하다.

딜쿠샤는 1959년 자유당 조경규 의원이 소유했으나, 군사정권에 압수당했다. 법률적으로는 국유이지만 실제론 주인 없는 다가구주택 신세가 된 것이다. 한때 20가구가 깃들어 살았다. 2006년 9월19일 문화재청 공고를 통해 문화재 등록 예고 공고가 나갔지만 점유자 처리 문제가 꼬이면서 불발됐다. 문화재 등록이 재추진되고 2017년 8월8일 등록문화재 제687호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으로 등재됐다. 역설적이지만 소유 문제가 복잡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복원을 마친 뒤 백범 김구의 집무실이었던 경교장, 가회동 백인제 가옥처럼 하우스 뮤지엄 형태로 꾸며 개방할 예정이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는 한국과 인연을 맺은 테일러 가문의 제1대 조지 테일러와 제2대 앨버트 테일러가 나란히 묻혀 있다. 테일러의 묘비명에는 셰익스피어가 죽음의 편안함에 대해 읊은 “태양의 열기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대여, 그대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 보상을 받았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