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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살 현역 “아직도 축구 경기 있는 날은 설레”

‘현역 최고령 선수’ 오진영 할아버지…서울 80대 축구단의 맏형

등록 : 2016-05-19 14:20 수정 : 2016-05-19 15:04
소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해 80년 넘게 현역으로 뛰고 있는 93살의 오진영 선수가 지난 9일 효창구장에서 열린 연습경기에 앞서 축구화 끈을 조이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2쿼터 25분 경기가 끝나갈 무렵, 홍팀 공격수가 높이 찬 공이 페널티 구역 안쪽으로 넘어온다. 실점 위기다. 청팀의 오른쪽 수비를 맡던 오진영 할아버지가 상대편과 가벼운 몸싸움을 하며 훌쩍 뛰어오른다. 멋진 헤딩. 공은 청팀 선수에게로 떨어졌다. 위기를 넘겼다.

“머리 안 아프냐고? 그럼, 괜찮지.”

2쿼터가 끝나고 라커룸으로 들어오는 오 할아버지의 얼굴에 은근한 웃음이 번진다.

10분 남짓한 휴식 뒤 3쿼터 휘슬이 울렸다. 3쿼터 초반 다시 청팀 진영 매우 깊숙이 센터링(앞으로 나갈 위치를 확보하면서 선수가 드리블하던 공을 중앙으로 패스하는 것)이 넘어왔다. 이번에도 오 할아버지가 점프를 했다. 어, 이상하다. 머리에 맞은 공이 청팀 골대를 향했다. 홍팀 선수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이크, 자책골이다.

“월드컵 스타들도 자살골을 넣을 때가 있잖아. 허허.”

경기를 마친 그의 얼굴엔 머쓱한 웃음이 흘렀다.

5월9일 낮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한 3쿼터 75분의 게임. 5월 초답지 않은 따가운 햇살 아래서 오 할아버지는 가뿐하게 ‘서울 80대 축구단’의 청홍팀 연습경기를 마쳤다. ‘서울 80대 축구단’은 선수 대부분이 80살 이상인 고령 축구단이다. 오 할아버지는 우리 나이로 올해 93살, 그러니까 1924년생이다. 3·1 운동이 일어나고 5년밖에 지나지 않은 ‘까마득한’ 때에 태어났다.

“아흔살이 넘어서도 시합 뛰는 사람은 아마 없을걸. 따져 볼 방법은 없지만, 내가 세계에서 최고령 현역 선수일 거야.”


평균 나이가 81살인 축구단 선수들이 연습경기를 하기 위해 골대를 옮기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그는 ‘현역’이란 단어에 힘을 줬다. 오 할아버지는 한달에 네댓 차례 경기를 치른다. 팀의 동료 선수들이 대부분 10살 이상 아래다. 하지만 경기에서 배려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당연히 뒤처지고 싶지도 않다. “확실히 예전보다 순발력이 떨어졌어. 마음만큼 몸이 움직이지 않아. 전에는 운동하고 밤에 잠을 자면 다음 날 몸이 풀렸는데 지금은 도리어 피곤해.” 그래서인지 이날 패스 미스나 헛발질이 심심찮게 나왔다.

그래도 경기가 있는 날은 설레고 기분이 좋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 있는 집에서 지하철을 이용해 서울 경기장으로 오지만 조금도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 할아버지의 ‘축구 내공’은 80년이 넘게 쌓였다. 평남 강서군이 고향인 그는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중학교까지 선수 생활을 한 뒤, 실업팀 격인 강서탄광의 축구단에서 공격수로 뛰었다.

“그 시절에 축구화 신고 공을 찼으니 대단했지. 1945년 해방이 된 뒤에는 유독 8월에 대회가 많았어. 해방일(8·15)을 기념하려 했던 모양이야. 군 대회, 도 대회에서 우승도 제법 했어.”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오 할아버지는 남쪽으로 내려왔다. 강서군에는 홀로된 어머니와 네 형제가 남았다. 자신과 함께 미리 남쪽에 와 있던 오 형제는 꼼짝없이 이산가족 신세가 됐다. “남북이 이산가족 상봉을 할 때마다 빠짐없이 신청을 했는데 안 됐어. 고향에 꼭 한번 가 봤으면 좋겠는데….”

남쪽에선 축구를 생업으로 삼지 못했다. 먹고살기 위해 직장도 다니고, 개인 사업도 했다. 대신 조기축구 팀에서 축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동호인 축구를 하며 이름이 알려져 자연스레 ‘서울 80대 축구단’의 맏형이 됐다.

김광희 감독이 선수들에게 경기 중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아흔살이 넘었는데 혹시 너무 위험한 운동을 하는 건 아닐까? “경기 중에 미리미리 조심을 하지. 기초가 없는 사람들과 시합을 할 때는 위험 상황에서 양보를 하기도 해. 그동안 축구를 하면서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적은 없어.” 워낙 좋아하고 오래해 온 운동이라 가족들도 크게 만류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 정도란다.

왜 굳이 축구를? “전신운동이라서 좋아. 예전에 골프도 쳐 봤는데 도무지 운동 같지 않더라고. 게다가 후배들이 ‘선배님’, ‘형님’ 하면서 커피도 가져다주고, 자리도 양보하고 대접까지 받아. 이 나이에 이런 형제 같은 사람들이 어디 있어?”

경기가 없는 날에는 대체로 새벽 5시에서 5시30분에 일어나 인근 학교 운동장에서 30분쯤 달리기를 한다. 이 달리기 외에 평소에 하는 특별한 건강 관리 비결은 없다. 잠자리에는 밤 12시 넘어서 든다. 아침과 저녁 식사 때 막걸리 한컵을 반주 삼아 마시고,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그럼 축구는 언제까지?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할 거야. 건강하니까 축구를 하고, 축구를 하니까 건강하고.”

정재권 선임기자 jjk@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