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00년 만에 열린 비밀의 숲
서울, 이곳 l 동대문구 홍릉숲
등록 : 2026-10-07 18:16 수정 : 2026-10-08 11:15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중국의 약리학자 투유유는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치료성분인 아르테미시닌을 추출했다. 암 치료제로 사용되는 파클리탁셀 성분은 ‘주목’이라는 나무의 껍질에서 처음 발견됐다.
세상엔 인류가 극복하지 못한 질병이 아직도 많다. 의학이 가야 할 길이 까마득히 멀어 보이지만 어쩌면 그 답은 우리가 매일 보는 익숙한 식물들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식물 천연물을 통한 치료제 개발이 속속 이뤄지면서 식물 주권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식물 주권이란 한 나라가 자국의 식물과 유전자원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외국 기업이 우리나라 자생식물에서 유효성분을 연구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면, 우리나라 법에 따라 사전 승인을 받고 연구나 상품화에서 생긴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식물 주권이다.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자생식물이 존재하며, 이것은 의약품이나 화장품 등 다양한 영역에서 무궁무진하게 활용될 수 있다. 자생식물을 찾아 기록하고 표본과 종자를 확보하는 일, 유전정보와 유용성분을 연구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 식물 주권을 지키는 최전선에 존재하는 기관이 바로 국립산림과학원이다. 이 식물 주권을 지키는 최전선인 국립산림과학원이 자리한 곳이 바로 동대문구에 있는 홍릉숲이다.
홍릉숲에서 식물 연구가 이뤄진 역사는 대략 100년이 넘는다. 시초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세워진 임업시험장이다. 그 전에 이곳은 홍릉으로 불렸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고종은 여러 후보지를 물색한 끝에 청량리를 새 능지로 결정했고 이후 22년간 이곳은 홍릉으로 관리됐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경기도 남양주 금곡, 지금의 홍유릉에 고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명성황후의 능도 옮겨 합장했다. 왕릉은 가고 없지만 지명은 여전히 홍릉으로 남았다.
식민지 조선의 산림자원을 조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임업시험장은 광복을 맞으며 그 주체가 바뀌었고 존재 이유도 달라졌다. 대한민국 정부의 산림정책을 지원하는 국가 연구기관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 과정에서 기억해야 할 인물이 김이만이다. 그는 화려한 학술논문을 남긴 학자는 아니었지만, 두 발로 전국 각지를 다니며 우리 식물 자원을 직접 찾아내고 모으고 길러낸 숨은 공로자다. 식물 주권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전국의 산과 섬을 누비며 우리 식물 자원을 찾아 기록했고, 그것을 홍릉숲에 옮겨 심었다. 오늘날 홍릉숲이 대한민국 자생식물의 보고로 자리하기까지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나무 할아버지’ 김이만이라 부른다.
청량리에서 나고 자란 지인에 따르면, 이 근처에 오래 살았어도 안에 들어와본 건 올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0년 넘게 연구림으로 지켜온 숲을 올 3월28일 전면 개방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제한적으로 개방되던 홍릉숲을 이제는 평일과 주말 상관없이 누구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100년 만에 열린 비밀의 숲이라는 입소문 때문에 울창한 원시림이나 예쁘게 가꿔진 숲길을 기대한다면 살짝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요즘처럼 잘 가꿔진 공원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 홍릉숲은 어쩌면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대신 홍릉숲엔 다른 데 없는 우리의 토종 식물이 있고 자연 그대로의 생명이 있다. 4월에는 제주왕벚나무 아래에서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속리산 정이품송의 후계목도 이곳에 있다. 100년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홍릉숲의 단풍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일 년에 대한 계책에는 곡식을 심는 것만 한 일이 없고, 십 년을 대비한 계책에는 나무를 심는 것만 한 일이 없으며, 평생을 위한 계책에는 사람을 심는 것만 한 일이 없다”고 했다. 홍릉숲에 와서 보니 나무를 심는 일이 그저 십 년 앞만 내다보는 일이 아님을 알겠다. 당장은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낸 그 누군가의 수고가 국가의 미래다.
이름도 신기한 비짜루나 조뱅이, 이삭여뀌 같은 약용식물부터, 독성이 있어 ‘주의가 필요한 식물’이라는 표지판이 붙은 미치광이풀이나 투구꽃 등. 이렇게 다양한 식물 중에 미래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그 무언가가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1968년에 조성된 낙우송숲은 홍릉8경 중 제8경에 해당한다. 숲 아래에 다양한 약용식물을 조성하여 그늘정원의 대표 사례가 되고 있다.
홍릉숲은 명성황후의 묘역이 있던 곳이며 모태의 수목원으로 그 역사성을 인정 받아 2020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홍릉에 들렀던 고종이 목을 축였다는 어정.
굵은 밤송이들이 후 두둑 떨어져 가을 정취가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