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친일매국의 대물림 호의호식을 바라보며

인문학자 김경집의 서울인문학 시민 분노 이유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조차 없는 태도

등록 : 2026-08-27 11:26
지난해 8월 광복 80주년을 맞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수용동 내부를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친일 과거 지우고 기득권 대물림
부역자 후손 흥하는 씁쓸한 현실
반민특위 와해로 역사청산 꼬여

무악재 구름다리를 건너 인왕산 자락길을 걷기 위해 서대문에서 무악재를 향해 오르다보면 독립문에 이어 그 뒤에 있는 옛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를 만나게 된다. 독립을 외쳤던 이들을 가두고 괴롭혔던 곳이 독립문 바로 옆에 있다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더 안타까운 건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독립문을 세우는 데 앞장섰던 이들 가운데도 나중에 친일매국노가 된 자가 꽤 많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이완용이다.

도저히 몰락하는 조선으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그랬던 자도 있고 약삭빠르게 잇속을 셈하여 그랬던 자도 있었을 것이다. 40년 가까이 그런 세상에 익숙해지니 해방은 언감생심이라 빨리 갈아탄 영리하고 이악스러운 자들이 출세하고 부자 되는 걸 보면서 혹여 늦을세라 더 악착같이 친일에 앞장섰을 것이다.

심지어 교육을 통해 미래 인재를 양성하겠다며 학교를 세운 자 중에는 황국신민 운운하며 황군 입대를 종용하고 위안부 참여를 독려한 자도 있었다. 더 한심한 건 이자들은 해방 이후 처벌받지도 않았고 공식적으로 반성하며 사과하지도 않으면서 태연하게 학교를 운영하고 교육자 행세를 했다. 그 학교들을 자식들이 지금도 버젓이 운영하고 있다.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그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일매국 문제가 사회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시대가 만들어낸 불가피한 피해자라느니 그 당시 친일하지 않은 이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냐며 물타기하는 자들이 여전히 핏대를 세운다. 이런 억지 논리를 거리낌없이 들이대는 자들은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관에 동조하며 교묘하게 진실과 정의를 희석한다. ‘너는 뭐 별수 있냐?’고 대놓고 조롱하기도 한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협박하고 끝내 해산시킨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패악의 유산이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부역한 인사들을 철저하게 솎아내고 응징했다. 특별법으로 고등사법원을 만들어 고위직 부역자를 재판하고 일반 부역자는 국민재판소를 신설해 재판했다. 조사는 철저하되 판결은 무관용 원칙에 따라 단호했다. 10년 동안 약 35만 명이 부역 혐의로 조사받고 12만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9만8천여 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3만8천여 명은 징역과 금고형을 받았고 6700여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어 1500여 명이 처형됐다. 재판 대상에는 정치인, 기업가, 언론인, 예술가 등이 대거 포함됐다. 인적 자산 위축에 대한 걱정으로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손실을 막기 위해 부득이하게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자비를 호소하기도 했지만 레지스탕스 출신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진실을 다투는 순간에는 정의가 자비를 침묵시켜야 한다며 철저한 응징을 주장했다.

왜 그들은 그토록 집요하고 철저하게 캐내고 처벌했을까. 역사가 반복된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어제의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부역이 잠깐의 안녕을 줄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게 되고 치욕을 감당해야 한다는 전범을 세워야 한다는 신념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친일매국노와 그 부역자들의 부귀와 허세를 겪었으면서도 아무도 처벌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이 해방 이후 더 잘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만약 나라를 잃게 되면 과연 나는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울 것인가 침략자에게 협력할 것인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부역하면 3대가 흥한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와 현실은 솔직히 나를 주저하게 한다. 또한 이제 곧 70살을 바라보는 나이니 삶에 미련 갖지 않고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젊은 시절의 나라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첫 밑돌을 잘못 고인 죄가 이토록 무겁다.

어느 배우가 집안을 과시하면서 4대가 의사 가문이고 증조부는 최초의 양의 개업의였으며 황실도 드나들었다고 자랑했다가 그가 정작 친일했다는 점이 낱낱이 드러나며 곤욕을 치렀다. 어떤 이는 증조부의 일로 죄를 묻는 건 가혹하다며 연좌제 운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노는 연좌의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적어도 부끄러워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조상의 허물은 덮고 잘난 건 부풀려 자랑하고 싶어 한다. 인지상정이라서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잃었던 나라를 어렵사리 되찾고 다시 시작하는 시기에 그런 야합과 불의를 저지르며 과거를 지우고 자신의 영광만을 떠드는 건 철면피일 뿐이다.

친일파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기록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의 고민도 깊었다. 일제강점기 신문에서 친일 행적을 조사하다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진 아들은 며칠 고심하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사실을 언급하며 의사를 여쭈자 아버지 임문호가 말했다. “종국아, 나를 밟고 가라. 내 이름이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임문호는 본디 천도교 지도자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일본의 식민지 정책 및 대외침략 전쟁에 동참할 것을 선동한 적이 있었다. 아들은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다. 적어도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가졌다. 임종국 선생 부자의 의연함이 새삼 놀랍다.

독립문을 지나면서 변절하고 친일한 독립협회 회원들과 옥에 갇힌 회원들의 대조적 삶을 새삼 떠올린다. 그리고 여전히 남은 부끄러운 과거와 탐욕스러운 현재의 삶을 성찰한다. 사마천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훗날의 일에 스승이 된다.”(前事之不忘 後事之師)

김경집(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