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우리가 가야 할 길

이광수의 진보를 위한 투자 ‘상인’과 ‘브라만’의 가짜 싸움 멈추고 지속 성장 위해 더 넓게 나눠야

등록 : 2026-06-05 11:37
2023년 1월20일 화재가 발생한 강남구 구룡마을 현장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사진)와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방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서민 불평등 방치한 두 엘리트 진영
텅 빈 지방과 심화하는 수도권 격차
계층 사다리 복원은 국가 전략 과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의 정치 대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쪽에는 민족주의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상인 우파'가 있고, 다른 쪽에는 고학력·국제주의적인 ‘브라만 좌파'가 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프랑스에서는 국민연합과 사회당이 이 구도를 보여준다. 피케티가 날카롭게 짚는 것은, 이 대결이 진짜 계급 싸움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엘리트 집단이 서민 대중을 나눠 지배하면서 정작 불평등을 줄이는 문제는 항상 뒷전으로 밀린다는 것이다.

이 틀은 한국 정치에도 놀랍도록 잘 맞아 떨어진다. 서울은 전국 17개 시도 중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 사이의 격차가 가장 큰도시다. 그 서울을 무대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끊임없이 부딪힌다. 겉으로 보면 이념 싸움 같다. 진보 대 보수, 노동 대 자본, 개혁 대 수구.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서로 다른 두 엘리트 집단이 각자의 방식으로 대중을 끌어모으는 구도에 가깝다.

민주당은 전형적인 ‘브라만 좌파'다. 명문대, 고학력 출신 법조인과 교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당의 핵심을 이룬다. 이들은 인권과 다양성, 국제적 가치를 내세우지만 정작 자신들이 사는 강남·서초·마포의 아파트값이 오르는 것에는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과거 민주당 정부 5년 동안 서울아파트 가격 중간값은 두 배 가까이 올랐다. 부동산 세금을 강화하겠다는 말과 달리 자산 불평등의 핵심 구조는 그대로였다.

국민의힘은 반대편에서 ‘상인 우파'의 방식을 쓴다. 반공·안보·성장의 언어로 무장하고 때로는 ‘엘리트 기득권'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지만, 그 정책의 혜택은 대기업과 금융 자산을 가진 계층에 돌아간다. 한국의 자산 불평등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으로, 국민소득 대비 자산 격차가 9배를 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 가파른 불평등 구조를 두 정당 모두 뿌리째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피케티는 서구에서 1980년부터 2020년 사이에 흥미로운 변화가 생겼다고 말한다. 소득이 높을수록 우파를 지지하는 경향은 예전과 같지만, 학력이 높아질수록 좌파를 지지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결과 좌파는 점점 저소득·저학력 유권자를 잃고 고학력 전문직의 당으로 바뀌어갔다.

한국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수도권의 고학력 전문직과 대졸 청년층이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이 된 반면, 지방 중소도시와 농촌의 서민들은 점점 보수 진영이나 지지 정당이 없는 쪽으로 이동한다. 이 갈라짐이 공간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다. 농촌과 소도시는 대도시에 비해 대학과 병원이 훨씬 멀고, 세계 경쟁의 파도를 더 직접적으로 맞는다. 반도체와 플랫폼 경제가 만들어낸 이익은 수도권에 쌓이고, 지방 제조업 도시는 텅 비어간다. 서울 강남의 학원가는 부모의 계층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핵심 통로가 된 지 오래다. 강남구에는 전용 스파와 실내 골프장을 갖춘 초호화 아파트가 즐비하지만, 같은 강남구 안에 있는 구룡마을은 합판과 고철로 지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버스로 3㎞ 거리지만 그 사이의 삶의 거리는 수십 년이다.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국민 4명 중 1명이 우리 사회 갈등의 가장 큰 원인으로 빈부 격차를 꼽았다. 그 비율은 2019년 18%에서 2021년 27%로 빠르게 높아졌다. 그런데 이 불만이 선거를 통해 불평등을 줄이는 정치로 이어지지 못하고, 두 엘리트 진영 사이의 감정싸움으로 소비된다. 한쪽은 젠더·인권·역사 문제로, 다른 쪽은 반공·안보·민족 정체성으로 유권자를 붙잡아둔다. 그 사이에서 임금 불평등, 자산 격차, 지방 소멸이라는 진짜 문제들은 선거 때마다 중심에서 밀려난다.

출구는 분명히 있다. 역사가 그 가능성을 이미 보여준 바 있다. 피케티가 일깨우듯 20세기 중반의 복지국가로의 전환은 엘리트의 선의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분배 정치를 되살린 데서 비롯됐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1987년 민주화와 노동자 대투쟁이 함께 터졌을 때 한국 사회는 짧지만 뚜렷하게 계급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가능성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만드는 일이다. 수도권 고학력 전문직과 지방 소도시 공장 노동자, 배달·플랫폼 일을 하는 불안정한 청년 노동자와 농촌의 고령 주민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찾아내는 것-그것이 새로운 정치의 시작이다. 부동산으로 애쓰지 않고 번 돈에 제대로 세금을 매기고, 지방의 의료와 교육 인프라에 과감히 투자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쪼개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해소하는 것. 이것은 낡은 이념 논쟁의 산물이 아니다. 성장의 결실을 더 넓게 나눠야 지속적인 성장도 가능하다는 냉정한 경제 논리 위에 서 있다.

한국은 불과 한 세대 만에 극심한 가난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다. 그 압축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국민 모두가 교육과 노력으로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사다리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이를 되살리는 일은 단순한 복지확대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와 경제의 다음 단계를 여는 전략적 과제다.

구룡마을과 타워팰리스의 거리를 좁히는 정치-그것이 브라만과 전사의 허구적 싸움을 넘어 대한민국과 그리고 서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이광수 ‘진보를 위한 주식투자’ 저자·투자분석가

이광수 ‘진보를 위한 주식투자’

저자·투자분석가

korea.analyst@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