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

[서울&] 서울에서 물멍하기 가장 좋은 곳

서울, 이곳 l 강동구 광진교8번가

등록 : 2026-05-21 11:17
한강의 다른 전망대들과 달리 광진교8번가는 국내 유일의 교각 하부전망대로, 흐르는 강물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주변에 불면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복용하고 있는 약의 부작용으로 불면증이 꽤 심한 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잠을 못 자 애를 먹으면서도 마감 전날엔 희한하게 잠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평소엔 자제하던 커피를 마감 때는 몇 잔이나 마셔도 달게 잔다. 시험 전날 평소보다 더 많이 자는 원리와 똑같다. 불면을 해소하기 위해 좋다는 방법을 다 써봤지만 마감보다 좋은 처방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마감 다음으로 내가 신뢰하는 불면 처방 중 하나는 멍때리기다. 나는 주로 산책하거나 아니면 좀 특이하지만 마늘을 까면서 멍때리기를 한다. 이건 좀 오래된 습관인데, 얇고 투명한 비닐 막 같은 마늘껍질을 정교하게 제거할 때면 순식간에 초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집중력이 생산적인 집중력과는 다르다. 그저 무의식의 세계, 무념무상의 세계로 홀딱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마치 랙이 걸려 버벅거리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는 행위와 비슷하다.

제대로 멍때리기를 하려면 먼저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를 배제해야 한다. 그리고 불이든, 물이든, 돌이든 자연의 대상 하나를 정해 가만히 응시한다. 그러다 슬그머니 초점을 흐리면 멍하니 무념무상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숲멍, 불멍, 물멍, 돌멍. 방법은 이름 붙이기 나름이다. 멍때리기 대회에서는 15분 간격으로 참가자들의 심박수를 재서 가장 안정적인 심박수 그래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준다고 한다. 그만큼 멍때리기가 사람을 안온한 상태에 놓이게 한다는 것이다.

광진교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전망대로 갈 수 있다.

광진교8번가는 내가 아는 한 서울에서 물멍하기 가장 좋은 곳이다. 그것은 강과 가까운 입지 덕분이다. 한강 다리의 다른 전망대들이 주로 다리 위 높은 곳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는 형태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광진교8번가는 국내 유일의 교각 하부전망대다. 쉽게 말해 우리가 걸어 다니고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다리 위에 전망대가 있는 게 아니라 다리 밑에 전망대가 있다는 뜻이다.

강물 쪽으로 한층 가까이 내려와 있다보니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흐르는 강물과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이 눈에 들어와 그저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물멍에 최적일 수밖에 없는 입지다.


한쪽으로는 롯데월드타워가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구리 쪽 한강을 조망할 수 있다.

그뿐 아니다. 광진교8번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광진교 여덟 번째 교각에 위치하기 때문으로, 즉 한강을 남북으로 놓고 봤을 때 전망대가 거의 강 중앙에 있다는 뜻이다. 동서로는 강동 쪽에 있지만 남북으로는 강의 중앙에 해당한다. 한강공원에서는 강 옆에 즐비한 아파트로 시선이 가지만, 광진교8번가에서는 동과 서로 길게 뻗은 한강을 강의 정중앙에서 장벽 없이 바라볼 수 있다. 특히 바닥을 3중 강화유리로 만들어 강의 흐름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했는데, 운이 좋은 사람들은 물고기 떼가 강물을 헤엄치는 모습도 보았다고 한다.

창가에 소파를 배치해 고요하게 물멍을 즐기기 좋다.

광진교는 한강 다리 중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편이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착공해 1936년 완공된 다리로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연결한다. 한국전쟁 당시 폭파됐던 것을 1953년 미군이 복구해 내내 사용하다 안전 문제와 천호대교 교통량 분산 등 주민들의 요구를 수렴해 1997년 확장공사에 착공했다. 2009년 걷고 싶은 다리 조성 사업으로 총 4차로였던 다리를 2차로로 축소했고, 대신 보행로와 자전거 전용도로를 신설해 멋진 산책 코스로 변모했다.

광진교8번가도 이때 생긴 것으로, 얼핏 보면 카페처럼 생겼지만 여느 카페와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이곳에서는 직접 음료를 판매하지 않는다. 대신 외부에서 음료를 가져와 마시는 건 가능하다. 입장료는 무료. 음식물 섭취는 안 된다. 개방 시간도 계절에 따라 다르고 심지어 겨울에는 석 달 동안 문을 열지 않는다. 봄부터 가을까지만 이용할 수 있다. 3월과 11월은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 4~10월은 낮 12시부터 저녁 8시까지 문을 연다. 한강의 선셋 명소로 인기가 많고, 특히 롯데월드타워가 보이는 야경으로 유명하다.

교각 하부 테라스.

달리는 사람들, 강아지와 산책 나온 시민들, 한강 라면과 치맥을 즐기는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가세해 한강은 어디를 가도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그저 고요히 강물을 바라보며 물멍을 즐길 수 있는 한강의 또 다른 얼굴을 보고 싶다면 광진교8번가를 추천한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