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인가 1994년인가 하여간 그 무렵이다. 문화방송(MBC) 라디오에서 ‘올드 벗 굿 카페’(Old but Good Cafe)라는 코너를 진행했다. 오래된 카페와 그곳에 담긴 묵은 이야기를 소개하는 코너였다. 세상에 제일 좋아하는 일이 방송인지라 무얼 맡아도 좋을 때였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그 코너를 진심으로 좋아하며 열정적으로 카페를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취재했던 카페들을 어디 좀 잘 기록하고 모아둘 걸 그랬지 싶다. 애초에 기억이란 왜곡되기 마련이어서 내 알량한 기억은 사소한 감정과 뒤섞여 실제에서 꽤 멀어진 형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도록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내 마음에 남은 곳이 있으니,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했던 아주 작은 카페 ‘귀천’이 바로 그곳이다.
귀천 카페 내부 모습. 가게는 예전보다 조금 넓어졌지만 걸려 있는 시와 사진은 그대로다.
그때 내가 모과차를 마셨는지 대추차를 마셨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곳에서 내가 무척 오랫동안 울었다는 것. 그 순간을 떠올리니 신기하게도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아이처럼 해맑은 천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왜 그리도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펑펑 우는 젊은 아가씨가 순수해 보여 그랬는지, 아님 목 여사 당신도 함께 울고 싶었는지 1993년 겨울, 유난히 어두컴컴하고 엄청나게 작았던 카페 ‘귀천’에서 목순옥 여사는 내게 꽤 오랜 시간을 내주었다.
운전하기 시작한 뒤로는 인사동을 통 드나들지 않았다. 시내에 나갈 일이 있어도 주차 걱정에 일만 보고 바로 귀가했지 한가로이 차를 마실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그사이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설마 아직도 그 카페가 있겠나 싶었다. 아니, 인사동, 골목길, 시, 카페 그 모든 걸 고스란히 잊고 살아왔다.
그런데 나무에 붙은 가지처럼 인사동 거리 양옆으로 줄줄이 뻗은 좁디좁은 골목길이 여전히 있었고, 그 좁은 골목길 한편에서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귀천’을 발견했다. 그건 마치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를 찾아냈을 때의 기분과도 같다.
진하고 되직한 대추차의 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가게는 예전보다 아주 조금 커졌고 아주 조금 밝아졌지만, 벽에 걸린 천 시인의 사진이며 시도 그대로였고 직접 담근 모과차, 되직한 대추차 맛도 그대로였다. 다만 주인장이 바뀌었다. 그 옛날 ‘귀천’을 운영했던 목순옥 여사는 천 시인을 따라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 지 15년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은 목 여사의 조카 목영선씨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인사동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의 행정구역으로 치면 중부(中部) 견평방(堅平坊)에 속한다. 견평방은 조선시대 최고 번화가였고 시전, 궁가, 관청 등이 혼재한 명실상부 한양의 심장부였다. 일반 서민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살았던 곳이며, 근대 경성에 이르러서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로 불리는 젊은이들이 꿈과 사랑과 시대의 아픔을 견뎌낸 곳이기도 하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조계사 건너편 센트로폴리스 지하에 있다.
조계사 건너편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600년 도읍 한양의 과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긴 세월의 더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역사 도시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를 원위치에 복원했다는 점에서 생생한 감동이 느껴진다. 60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전동 골목길을 걸으며 양옆으로 조선시대 건물 터를 직관하는 느낌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600년 전에도 한양은 조선의 도읍이었고, 지금도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다. 시간을 알리는 종루가 있어 종로라 불렀던 곳은 지금도 여전히 종로라 불리고,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였다 흩어진다 하여 운종가라 불렀던 곳은 이제 전세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었다.
전동 골목길. 원위치에 복원해 더욱 생생한 감동이 느껴진다.
나의 인생 하나를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삶이 고행 같지만, 겹겹이 쌓인 역사 속 이 거리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처럼 내 삶도 그렇게 이 거리를 스쳐 지나가겠지 생각한다면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새해에는 우리의 마음이 그랬으면 좋겠다. 조금은 더 넉넉해지고 조금은 더 평온할 수 있기를.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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