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

장충단에 새겨진 이야기

서울, 이곳 l 중구 장충단공원

등록 : 2025-11-13 16:34
10월 25일 남산 하늘숲길이 개방되었다.

비운의 시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역사를 비극으로 물들인다. 때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로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낭인들, 그리고 조선군 훈련대가 경복궁에 난입했다. 이들은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청궁으로 들이닥쳤고, 황후를 찾아내 참혹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함께 있던 조선인 군인들은 훈련대 소속 무관들로, 이 가운데 우범선이 있었다.

우범선은 훈련대 제2대 대장으로 일본 낭인들을 이끌고 건청궁을 포위했으며, 명성황후를 찾아내고 살해하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을미사변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우범선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여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의병 출신 조선인에게 암살당한다. 그때가 1903년. 우범선의 아들 장춘이 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바로 그 우장춘이다.

조선의 황후를 살해한 아버지. 그리고 역적의 자식이라 손가락질받으며 자랐지만 그럼에도 고국으로 돌아온 아들. 학자들은 말한다. 만약 우장춘이 계속 일본에 남아 있었다면 어쩌면 노벨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분명 수월한 길이 아님을 그도 알았을 테지만. 그것이 아버지를 대신한 속죄의 길이었는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그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귀국을 결심하기까지 그가 가졌을 부끄러움과 아픔과 슬픔의 그늘진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남산 정상에서 서울시를 또렷하게 조망할 수 있다.

지난 주말 딸아이와 남산에 갔다. 어떻게 노선을 정할까 고민하다 장충단공원에서 시작하는 길을 선택했다. 남산은 서울의 한 중간에 있어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다양하다. 남산3호터널 부근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주말엔 기본 한시간 기다림은 각오해야 한다. 해방촌에서 소월길로 올라가는 길은 카페랑 맛집이 많고, 이태원에서 하얏트호텔 쪽으로 올라가는 길도 동네 구경이 재미있다. 다양한 경로 중 장충단공원에서 올라가는 길은 조용하고 나무가 많아 내가 좋아하는 길이다.

장충단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


장충단공원은 을미사변과 관련 있는 장소다. 1900년 고종은 황후의 시해를 막다 희생당한 시위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단을 올리고 매년 봄가을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이름이 장충단(獎忠壇)이다. 충절을 권면한다는 뜻에서 장충(獎忠)이다. ‘장충단’이라 쓴 비석은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필체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수많은 풀과 나무가 꺾이듯 우장춘 부자의 이야기는 을미사변이 낳은 비극의 단면일 뿐 더 큰 아픔과 슬픔이 문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속한 개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사연들만큼이나 장충단의 운명도 기구하다.

역사책을 읽다보면 답답하고 속상한 순간이 종종 등장하는데, 장충단이 세워지고 오래가지 않아 이 자리에서 벌어졌던 일들도 그중 하나다. 원래 장충단 규모는 지금 장충단공원이 있는 자리뿐만 아니라 길 건너 신라호텔과 국립극장, 그 건너편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넓은 부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일제의 침략이 더욱 집요하고 치밀해지면서 어이없게도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으로 둔갑했다. 장충단 비석은 뽑혔고 급기야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름을 딴 박문사(博文寺)라는 신사까지 세워진다.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다.

장충단 비석

장충단 비석 앞에서 우장춘 박사와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딸아이가 놀란 얼굴을 한다. 우장춘은 꽤 요즘 사람인 줄 알았고, 을미사변은 아주 먼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이냐며 말이다. 왕이 있던 시절 살던 사람과 대통령이 있던 시절 살던 사람이 동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 아이에겐 생경할 수도 있겠다. 우리 역사의 격변기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 나라 잃은 민족이 온몸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역사가 아주 먼 옛날이야기이고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지만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국제정세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남산에 가을이 내려앉았다.

사연이 많은 곳이어서인지 장충단에서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제는 남산으로 올라가야겠다. 마침 지난달 25일 남산을 관통하는 하늘숲길을 개방했다고 하니 그윽한 가을 숲의 냄새를 맡고 올 절호의 기회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