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

역사의 선물, 왕릉 답사

서울, 이곳 l 강남구 선정릉

등록 : 2025-09-11 20:16
500년 시간을 건너 빌딩 숲과 왕릉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초등학교 때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만화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뿅망치로 바닥을 내리치면 주변이 삽시간 정지 상태가 되면서 주인공과 친구들이 4차원 세계로 이동해 악당과 싸우는 내용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4차원 세계로 이동한다는 설정에 매료됐다. 그 만화를 통해 내가 사는 세상 외에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음을 상상했다. 만화에 얼마나 과몰입했던지 집 안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면 필시 4차원 세계에 있을 거라고 꽤 진지하게 추정했을 정도다.

선정릉에 와서 갑자기 이 만화 영화가 생각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안과 밖이 너무도 선명하게, 다른 세상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심의 빌딩 숲과 홍살문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 걸리는 이토록 이질적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시간 여행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바로 옆에 벤처기업과 금융사가 밀집한 테헤란로가 있고, 조금 더 걸어가면 사교육 1번지 대치동이 있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 동네에 오직 이곳만 정지된 듯 고요하다.

홍살문 너머로 빌딩 숲이 보이는 풍경.

선릉은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며, 정릉은 11대 임금인 중종의 능이다. 여기서 정현왕후 윤씨는 성종의 세번째 왕비로, 즉 중종의 어머니이다. 부연하자면, 성종의 첫째 부인은 수양대군의 킹메이커 한명회의 딸이며, 둘째 부인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이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능역을 당대 최고의 능역으로 조성하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연산군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폐위돼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폭군으로 돌변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릉과 정릉을 돌아보며 능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 읽다보니 어렵게만 느껴지던 역사의 인과관계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망이 머릿속에 자연히 그려진다. 외우려 노력할 땐 그렇게도 안 외워지더니 말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왕릉 답사가 더욱 즐거울 것이다.


왕릉의 가치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외에 숲의 가치로도 매우 소중하다. 그동안 선정릉 앞을 수도 없이 다녔으면서 안까지 들어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밖에서 보며 넓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은 면적에 놀랐고, 도심과 숲이 이렇게 완벽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능 주변을 걷다보면 소나무, 뽕나무, 느티나무, 때죽나무, 오리나무 등이 울창하게 식재돼 있어 이곳이 강남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왕릉을 지을 때 경복궁을 중심으로 10리 밖 100리 안에 조영했다고 하는데, 만약 이곳이 왕릉이 아니었더라면 강남 한복판 금싸라기 땅이 과연 이렇게 완벽한 숲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숲이 울창하게 잘 보존돼 있다 하여 이곳을 단순히 공원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왕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왕릉의 예법이 있다. 여흥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경건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주의해야 할 곳도 있다. 예를 들어, 조선왕릉에는 반드시 제향 공간인 정자각이 하나씩 있는데,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까지 나있는 길인 ‘참도’는 혼령이 지나는 길인 ‘신도’와 사람이 밟을 수 있는 ‘어도’로 구분돼 있다. 정자각에서 내려오는 계단에도 신계와 어계가 있는데, 신계는 사람이 밟아서는 안 된다. 월대에도 함부로 앉으면 안 되고, 공원 내에서 맨발 걷기도 금지돼 있다. 안내문에 써 있는 주의사항만 잘 지키면 얼마든지 쾌적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으니 어려워할 필요는 없다.

조선왕릉은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만약 외국인 손님을 맞이할 일이 있다면 이곳에 와서 능의 건축물이나 왕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나 이탈리아의 유물, 유적을 보면서 조상이 만들어둔 문화유산 덕에 후손이 덕을 본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찾아보면 서울 안에도 우리 조상이 안겨준 선물 같은 공간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이번 주말엔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의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