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세운 계획 중에 내가 가장 지키지 못하고 있는 분야는 운동이다. 하루에 1만 보는 걷겠다고 다짐했지만 못 지킨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제일 대기 쉬운 핑계는 날씨다. 가뜩이나 나약한 실천 의지를 무너뜨리기에 폭염과 혹한만큼 확실한 핑계는 없다.
그러나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여름과 겨울, 비 오는 날을 빼면 운동할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주변에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한여름엔 이른 새벽이나 밤에 걷고, 해가 짧은 겨울엔 한낮에 운동한다고 비결을 알려준다.
강동구에 있는 일자산은 경기 하남시까지 걸쳐 있는 산으로, 말 그대로 ‘한 일’(一) 자 모양으로 길쭉하게 뻗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장 높은 곳이 134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일자산을 따라 길동생태공원, 허브천문공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해맞이공원까지 남북으로 녹지공간이 꽤 길게 이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허브천문공원은 저녁 먹고 나와 가볍게 걷기에 최적의 장소다.
차가 쌩쌩 달리는 큰 도로에서 멀지 않지만 허브천문공원 이정표를 따라 좁다란 오르막길로 들어서면 마치 딴 세상에 다다른 듯 녹음이 우거진 자연의 세계가 펼쳐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복잡한 도시 한복판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쩜 길 하나 사이로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는지 신기하다.
허브천문공원에 오르기 전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이다. 숲으로 이어지는 초입에 캠핑장을 만들어놓았는데, 캠핑 장비가 없는 사람도 강동구가 설치해 놓은 텐트 시설을 대여할 수 있어 편리하다. 주말이나 휴일은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아 매월 5일 오전 10시 인터넷을 통해 사전 예약을 해야 하지만 평일 예약은 수월한 편이다. 공기 좋은 곳에서 고기 구워 먹는 재미에 당일 예약으로 이용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캠핑장 바로 옆에 숲 체험장이 있는데, 우거진 나무만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는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숲으로 성큼 들어갔다가 아뿔싸 여름 산에 오면서 겁도 없이 모기 기피제도 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먹을 게 많아 신이 난 모기들은 나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기세로 맹공격을 퍼부었다. 산모기들의 공세에 밀려 숲 안쪽으로 몇 발 들여놓지도 못한 채 바깥으로 후퇴하고 말았지만, 생각해보니 올여름 참 오랜만에 만나는 모기라는 생각이 이내 들었다. 올해는 폭염 때문에 모기가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는데, 설마 모기조차 반가워진 걸까?
허브천문공원은 길동배수지 위 약 2만5천㎡ 부지에 조성한 공원이다. 둥그렇게 트랙을 설치해 걷기 좋게 만들어놓았다. 트랙 안쪽으로는 다양한 허브를 심었고, 트랙 바깥쪽엔 군데군데 자작나무 숲이 있어 아름답다. 허브천문공원은 허브가 많아 허브공원이고, 천문을 관측하기에 좋아 천문공원이기도 하다. 실제로 공원 한쪽에 작은 천문대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늘을 가로막는 아무런 장벽이 없어 이곳에 오면 자꾸만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도시에선 불빛 때문에 밤하늘 별을 찾아볼 엄두를 못 내지만 이곳에선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어진다,
땅거미가 지고 공원 바닥에 설치한 조명등이 일제히 불을 밝히자 어떻게들 알았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해 트랙은 어느덧 걷는 사람들로 메워진다. 자연히 사람들의 대화 소재는 허브 이야기. 손으로 허브를 쓸어낸 뒤 손바닥에 남은 냄새를 맡으며 민트 종류인지, 바질 종류인지, 라벤더 종류인지 척척 알아맞히는 고수가 여럿이다.
한낮의 열기가 한풀 꺾인 공원엔 살랑살랑 바람이 인다. 향긋한 허브 향이 정신을 맑게 깨워준다. 밤이 성찰의 시간인 것은 낮에 내 마음과 시선을 앗아갔던 빛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일까? 낮에 했던 말을 꺼내 되씹어본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말걸. 조금 더 너그러울걸. 한 번 더 웃을걸…. 작고한 문학평론가 황현산 교수도 그러지 않았는가.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고.
향긋한 밤마실 덕분에 오늘 밤은 두 다리 쭉 뻗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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