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 하나도 안 늙었느니, 옛날 그대로라느니 얘기한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겠지만 사실이다. 내 눈에 그들이 옛날 얼굴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아마도 그들이 나와 같은 속도감으로 늙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는 차 안에 같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마치 정지한 듯 느끼는 원리처럼 말이다.
내게는 일 년에 대여섯 번은 꼭 만나는 30년 지기가 있다. 내 사회생활의 고향과도 같은 엠비시(MBC) 라디오에서 만나 같은 속도감으로 세월을 항해하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누구는 외국 나가 살고, 누구는 삐삐에서 휴대전화로 옮겨 타는 시기에 헤어져 연락이 끊겼고, 늦게 결혼해 아이 키우느라 바쁜 몇몇을 빼고 나니 셋이 자주 만나게 됐다.
우리는 규칙으로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각자의 동네를 돌아가며 만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일 많이 방문한 동네는 연희동이다. 그건 약속을 정할라치면 머릿속이 까매지는 나와 달리, 만날 장소를 미리 생각해두고 다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은 장소를 척척 떠올리는 연희동 친구의 안목 덕분이다.
어떨 땐 비건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해 생전 처음 보는 맛을 경험하게 해주고, 어떤 때엔 초록으로 하늘을 가린 호젓한 안산 숲속으로 안내해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호지차로 감동을 선사한다. 친구 덕분에 연희동을 들락거리며 아파트촌과는 다른, 연희동만의 바이브를 좋아하게 됐다.
이번에 친구가 안내한 곳은 2021년 개관해 지금까지 4년째 연희동 주민들의 예술안목을 키워온 ‘라이카시네마’다. 라이카시네마는 스페이스독(Space dog)이라는 복합문화 공간 지하에 있는 독립영화관이다. 객석은 전부 해서 40석밖에 안 되지만, 멀티플렉스 영화관보다 좌석 간격이 널찍하고 무엇보다 음향이 좋다. 하루 평균 6~7편의 각각 다른 영화를 상영하는데, 상영작과 시간표는 일주일 단위로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에 공지한다.
광고 없이 정시에 바로 영화가 시작되고, 당연히 외부 음식 반입도 안 된다. 오롯이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요즘 내게 딱 필요했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영화 관람이 쉬워진 시대를 살지만 희한하게도 영화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집에서 영화를 보면 편하지만, 그 편안함 덕분에 진득하게 끝까지 보지 못한 영화가 수두룩하다. 가입한 동영상플랫폼 서비스가 2~3개나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는데, 내 맘에 드는 영화를 발견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대체 누구 취향에 맞춘 건지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인하지 않은 영화를 만나보기 어렵다. 그렇게 몇 번 보다 말기를 반복하는 사이 영화에 대한 애정도 차츰 식어가고 있었다.
내가 라이카시네마를 찾았던 주엔 여름 일본 영화 기획전이 준비돼 있었다. ‘퍼펙트데이즈’와 ‘바닷마을 다이어리’ ‘스윙걸즈’같은 일본 영화들과 나의 인생작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 등이 마치 학창시절 시간표처럼 촘촘히 배치돼 있는데, 이 상영작들이 하나같이 어찌나 취향 저격이던지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더 정교한 창작자들에 비할 수 없겠지만 글 쓰는 일을 하며 창작의 고통이란 걸 어렴풋이 경험했다. 덕분에 다른 사람의 창작물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커졌다. 결혼하고 매일 식구들 밥상을 차리면서 이제는 남이 해주는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걸 알게 된 것처럼, 남들이 고생해서 지어낸 영화 밥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안다. 셰프가 만들어주는 대로 전적으로 맡기는 게 오마카세라면, 라이카 시네마의 안목을 믿고 영화관이 골라주는 영화를 골고루 맛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 오마카세인가.
친구가 핸드드립을 배워본 사람은 다 아는 신기한 사실 하나를 알려준다. 똑같은 원두를,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온도의 물로 내려도 누가 내리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천지 차이라는 것이다. 맞다. ‘누가’ 하느냐, ‘누가’ 옆에 있느냐가 내 삶의 풍미를 결정한다. “얘들아, 내 삶이 풍요로운 향기를 낼 수 있는 건 다 너희들 덕분이야, 감사해.”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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