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홍치마를 입은 여인네가 한 발을 올려 그네를 타고 있고, 몇몇은 냇물에서 멱을 감는다. 또 다른 여인네는 방금 전 머리를 감은 겐지 이제 감으려 하는 겐지 길게 땋은 머리를 양 갈래로 풀었고, 그 와중에 어떤 이는 머리에 봇짐을 이고 이들을 바라보는 그림. 누구나 한 번쯤은 교과서에서 보았을 그림,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이다.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는 예술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당시 생활상의 기록물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무척 흥미롭다. 요즘에야 일부러 단오를 기억하며 사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옛날 우리 조상들에겐 단오가 4대 명절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절기였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 모내기를 막 끝내고 무더위가 찾아오기 직전 냇가에서 멱도 감고 그네도 뛰며 몸과 마음을 한 차례 쉬어 갔다니 무척이나 시의적절한 이벤트였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그림에서 내가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머리를 감고 있는 여인들이다. 단옷날이니 창포물에 머리를 감았을 텐데, 어쩐 일인지 신윤복의 그림에선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라색 꽃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그 꽃으로 물을 우려 머리 감는 데 썼다면 신윤복처럼 세밀하게 묘사하는 화가가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특히나 색채를 화려하게 썼던 신윤복이 그 예쁜 보랏빛을 포기했을 리는 더더욱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림 한 편을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했다. 창포물은 꽃을 물에 끓여 만들었을지, 그 예쁜 보랏빛 꽃에선 어떤 향이 날지, 그걸로 머리를 감으면 정말 모발이 건강해지는지, 구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수제샴푸를 만들어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말이다. 궁금증이 일어 인터넷을 몇 차례 뒤적였더니 작은 호기심에서 출발한 알고리즘이 급기야 나에게 서울 도봉구에 ‘서울창포원’이란 곳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때론 알고리즘이 내 호기심보다 더 집요할 때가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나는 지체할 필요 없이 서울창포원을 직접 찾아가 보았다.
서울창포원은 평지에 조성돼 노약자가 산책하기 좋다
서울창포원은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 서울과 의정부시의 경계에 있다. 서울둘레길 1코스, 21코스와도 연결돼, 어디서 보아도 도봉산과 수락산의 기암괴석이 눈에 들어와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또 이곳엔 대전차방호벽이 있던 자리를 시민 문화공간으로 개조한 ‘평화문화진지’와 조선시대 나랏일로 여행하던 관리들이 하룻밤 묵어가던 ‘다락원’ 터가 나란히 인접해 있어 은근히 볼거리도 많다.
무엇보다 이름에서 명명하듯 창포를 주제로 한 서울의 유일한 생태공원이란 점이 흥미롭다. 내가 창포라는 말에 이끌려 이곳을 방문한 것처럼 다른 방문객들도 창포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창포꽃을 찍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그렇다. 솔직히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보랏빛 혹은 노란색의 창포꽃을 뜨거운 물에 우려 머리 감는데 썼을 거라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옷날 머리 감던 창포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꽃이 아니라고 한다. 단옷날 머리 감을 때 썼던 식물은 ‘창포’, 보랏빛 꽃은 ‘꽃창포’로 이 둘은 전혀 다른 식물이다.
창포와 꽃창포는 잎사귀 모양도 비슷하고 꽃이 피는 시기와 자라는 환경이 비슷해 헷갈릴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꽃의 모양이 다르다. 머리 감는 데 썼던 창포는 천남성목 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부들처럼 원통형의 꽃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피어난다. 창포물은 바로 이 식물의 뿌리와 잎을 달인 물이라는데, 어쩌면 신윤복의 그림에서 보랏빛 창포꽃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반면 꽃창포는 백합목 붓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쉽게 말해 붓꽃, 영어로 아이리스(iris)라고 한다. 즉, 서울창포원에 있는 창포는 단옷날 머리 감는 데 썼던 약용식물이 아니라 꽃창포, 붓꽃인 셈이다. 서울창포원은 지금 개선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구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꽃창포원과 습지원, 황톳길 등 대부분의 공간은 똑같이 개방하고 있다. 7월 말 공사가 끝나고 나면 한층 더 아름답게 피어날 창포원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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