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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구 필요” 방송에 병원 직행

‘100회 헌혈’ 정광준 양천구청 사회복지 공무원

등록 : 2020-07-2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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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2년간 헌혈

80대 노인에 4번 지정헌혈 기억 남아

대한적십자사 명예 전당에 이름 올려

“가능한 한 60대까지 헌혈하고 싶어”


100회 헌혈을 한 정광준 양천구 주무관이 10일 양천구 신정동 양천구청 근처 한 카페에서 헌혈 증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헌혈로 생명을 살리는 걸 봤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죠.”

100회 헌혈로 대한적십자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정광준(48) 양천구 자립지원과 장애인시설팀 주무관을 10일 양천구 신정동 양천구청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정 주무관은 신정2동 주민센터에 근무하던 지난 6월15일 100번째 헌혈을 했다. 정 주무관은 이날 “파노라마가 흘러가는 것처럼 고교 시절의 내가 보였다”고 했다. 다음날인 16일에는 헌혈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대한적십자사에서 적십자헌혈유공장(명예장)도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헌혈해온 정 주무관이 100회 헌혈을 하는 데는 꼬박 32년이 걸렸다. 성인 남성의 1회 헌혈량이 400㎖인 것을 고려하면, 정 주무관은 4만㎖를 헌혈한 셈이다. 한 통에 500㎖인 생수로 따지면 80병이나 된다. 정 주무관의 이런 헌혈에 대한 열정은 코로나19로 헌혈하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어 혈액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4시간 동안 원심분리기를 돌려서 백혈구만 뽑아냈죠. 비정상 증식이라 헌혈하는 사람이 힘들고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정 주무관은 지금껏 헌혈해오면서 급성 백혈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에게 백혈구를 수혈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2017년 2월 우연히 라디오를 듣는데 ‘급성 백혈병 환자에게 백혈구 수혈이 필요하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곧바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로 달려가 수혈 가능 여부를 검사하고, 그다음 날 다시 병원에서 백혈구 촉진제를 투약받았다. 정 주무관은 3일 동안 검사 등을 마치고, 4시간 동안 환자에게 백혈구를 수혈했다.

하지만 정 주무관에게서 백혈구를 수혈받은 환자는 안타깝게도 그해 10월 사망했다. “보호자인 딸에게서 ‘아버님이 편안하게 가셨다’며 고맙다는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고맙다는 말 들을 때 가슴 찡했습니다.” 그는 수혈했던 환자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연락을 해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정 주무관은 헌혈하는 사람이 수혈 환자를 미리 지정하거나, 환자가 수혈받기 전에 헌혈자를 지정하는 지정헌혈도 여러 차례 했다. 정 주무관은 2017년 3월부터 9월까지 말기 암 환자인 80대 할머니에게 지정헌혈을 네 번 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제 피를 수혈받고 돌아가셨죠. ‘왜 하필 내 피를 받고 돌아가셨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이상했습니다. 그나마 편하게 가셨겠다 싶어 위안이 됐죠.”

정 주무관은 열여섯 살이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헌혈했다. “헌혈증이 무척 가지고 싶었죠. 굵은 바늘 때문에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참을 만하더라구요.” 정 주무관은 고등학교 때는 두 달에 한 번꼴, 대학 다닐 때는 기회가 닿는 대로 헌혈했다. 본격적으로 헌혈할 때는 1년에 8~9회 정도 하기도 했고, 많이 할 때는 1년에 15회까지 한 적도 있다.

정 주무관은 2006년 1월 양천구청 사회복지과 장애인복지팀에서 첫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동 주민센터에서 근무하다가, 지난 1일 인사 발령이 나 12년 만에 장애인시설팀으로 돌아왔다.

정 주무관은 2018년 1월부터 신정2동 주민센터 방문복지팀에서 50대 독거남을 위한 프로그램 ‘나비남(나는 혼자가 아니다)’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이들의 여가 활동 욕구를 풀어주는 프로그램으로 사진전을 기획해 열기도 했다. 정 주무관은 “코로나19로 미뤄오던 두 번째 전시회를 하반기에 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발령이 났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정 주무관은 2009년 7시간이 넘는 어깨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아픈 걸 참고 있다가 어지럽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혈관 2개가 끊어져 있다는 말을 들었죠. 석회화건염으로 돌이 생겨서 혈관을 갉아먹는 병입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재활 과정을 거쳐 다시 건강한 모습을 회복했다. 이 때문에 그는 4년 정도 헌혈하지 못했다.

정 주무관은 앞으로 계속 헌혈하기 위해서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기름진 음식도 먹지 않는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헌혈할 때 기름도 함께 나와 좋지 않죠.”

정 주무관은 또한 “약을 먹으면 헌혈할 수 없어 웬만하면 약을 먹지 않는다”며 “미리 약 먹을 일이 없도록 신경쓴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매일 출퇴근 시간에 2만 보씩 걸으면서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헌혈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헌혈할 수 있을 때가 감사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 주무관은 잦은 헌혈로 왼팔 혈관이 잘 보이지 않아 오른쪽 팔로만 헌혈하고 있다. 그는 “일시적으로 아파도 내가 아직 수혈할 기회가 있다는 데 감사한다”고 했다.

정 주무관은 100번째 헌혈을 한 지 2주일 뒤인 29일, 101번째 헌혈을 했다.

“지금도 검사하면 간호사들이 혈소판, 헤모글로빈 수치도 높아 피가 좋다고 해요. 헌혈은 의학적으로 60대 후반이나 70대 전반까지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건강한 피를 줘야 하기 때문에 60대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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