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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익명의 고민에 공감의 ‘온기’ 전하는 어르신들

서초구 생명지킴-사단법인 온기 ‘손편지 답장’ 봉사 현장
한 자 한 자 정성껏 적어 내려간 글귀로 전하 는 ‘삶의 위안'

등록 : 2026-10-21 17:35 수정 : 2026-10-2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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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서울 양재동 서초문화예술회관 4층 회의실에서 열린 모임에서 서초구 생명지킴 활동가 7명이 온기 소속 직원의 도움을 받아 답장 작성에 열중하고 있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가족과 함께 있어도 문득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시려요. 사람은 원래 평생 이런 지독한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걸까요?”

지난 15일 서울 양재동 서초문화예술회관 4층. 회의실 탁자 위에는 누군가 익명으로 털어놓은 고민 편지와 함께 노란색 편지지, 편지봉투, 볼펜이 놓여 있었다. 마주 앉은 어르신 7명이 익명의 발신자에게 손편지 답장을 보내주는 마음돌봄 비영리단체 ‘사단법인 온기' 조현식 대표의 오리엔테이션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날 모인 어르신들은 서초구보건소에서 우울증 예방 등 전문 교육을 이수한 주민 ‘생명지킴 활동가’들이다. 앞서 서초구(구청장 전성수)는 지난 13일 온기와 업무협약을 맺었고, 이날 첫 번째 손편지 답장 모임을 열었다. 활동가들은 익명으로 보낸 고민 편지 속에 담긴 절박한 호소에 ‘온기우체부’라는 이름으로 따뜻한 공감의 답장을 쓰며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고자 자리를 함께했다.

조현식 대표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정답을 전달하려 하지 마세요. 대신 여러분이 건네는 공감이 진심이면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힘이 됩니다”라고 강조했다. 누군가의 마음에 공감하는 일은 그만큼 섬세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30여 분 동안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 “답장을 작성해주시면 됩니다”라는 안내가 이어지자, 회의실은 조용한 가운데 손글씨로 편지지를 메우는 소리만 가득 찼다.

8월의 제안, 전국 최초 지자체 ‘온기우체부’의 물꼬


서초구와 온기의 협력은 서초구보건소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평소 사단법인 온기의 소식지를 구독하던 보건소 담당자는 길거리 캠페인이나 대면 상담만으로는 은둔·고립 청년들에게 가닿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지역 사정에 밝은 주민 활동가들이 직접 고민 편지에 답장을 써주는 자원봉사에 참여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온기도 이를 적극 환영했다. 협력 논의는 속도감 있게 진행돼 마침내 지난 13일 서초구보건소에서 공식 업무협약(MOU)이 체결됐다.

그동안 온기의 활동 취지에 공감하는 다양한 기관들은 온기우편함을 설치할 공간을 내주는 정도에 그쳤다.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도 광진구가 지난 9월 청년 복합문화공간인 ‘광진 청년아지트’ 1층 로비에 온기우편함을 설치했다. 취업과 주거 불안으로 고통받는 1인가구 청년들이 일상 속에서 편안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도록 우편함 공간을 제공하고, 답장은 온기 소속 자원봉사자에게 위임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서초구는 보건소가 양성한 생명지킴 활동가들이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적극적인 협력 모델로 발전했다. 온기로서도 지자체가 운영 중인 주민 자원봉사단과 협력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녀와의 관계와 똑같네요”…정답 대신 공감을 건네는 법

이날 오리엔테이션에서 조현식 대표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손편지 답장을 나누며 축적된 ‘편지 작성 원칙과 금기어’를 소개했다. 그는 “초창기 한 자원봉사자가 우울을 호소하는 청년에게 ‘일기를 써라’ ‘운동을 해라’라고 조언했다가 도리어 큰 상처를 받았다는 후기를 받은 적이 있다”며 “고통에 빠진 이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나 정답이 아니라 함께 머물러주는 공감”이라고 강조했다.

조 대표가 제시한 답장 작성 원칙은 단순하지만 명확했다. 고민 글을 가벼이 대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물결표(~)와 ㅎ, ㅋ과 같은 자음 사용을 금지하고, 고민을 보편적 통과의례로 치부하는 “남들도 다 겪는 흔한 고민”이라는 식의 말도 경계했다. 이미 벼랑 끝에서 버티다 펜을 든 사람에게 “노력해봐라” “조금만 더 버텨라”라는 식의 강요도 금기어다. 특히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 “아직 어려서 모르는 거다”라는 훈계는 금물이며, 설령 사연이 반말로 왔더라도 반드시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안내했다.

대신 답장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일상의 안부를 묻는 문장으로 시작해 상대의 고통을 억지로 지우려 하기보다 외로움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지혜롭게 껴안는 시선을 건네는 5단계 구조로 이어진다. 답장을 받는 이는 ‘온기 님’, 보내는 이는 ‘온기우체부’로 통일하고, 주소 표기 위치까지 우체국 규격 요건에 맞춰 정밀하게 정돈한다. 작성된 편지는 온기 내부의 운영위원회 검수 과정을 거쳐 혹시 모를 상처를 예방한다.

이 같은 답장 작성 원칙을 경청하던 한 구청 관계자는 “부모와 자녀와의 대화에서도 똑같이 적용돼야 할 소중한 지혜”라고 평가했다.

“연애편지 고수인데도 어려워”…어르신과 청년 세대 간의 교감

이날 첫 답장 작성을 마친 활동가들은 한목소리로 편지 쓰기의 막중한 책임감을 토로했다. 한 활동가는 “9남매의 막내로 눈치가 빨라 어릴 적 친구들 연애편지를 도맡아 썼고, 지역 글짓기 대회 1등도 해봤어요. 그런데 이 편지는 무너진 마음을 어루만져야 하니 훨씬 더 어렵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보건소에서 어르신들의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검사를 도우며 저마다 다른 고민의 부위를 마주해왔다”며 “교과서 같은 정답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차분히 배려하는 언어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활동가는 백내장 수술 후유증으로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데도 돋보기를 쓴 채 정성껏 답장을 완성했다.

또 다른 활동가는 가장 늦게 회의실을 나서며 “하필 오늘 오전 쓰러질 뻔할 정도로 속이 울렁거리고 몸 상태가 안 좋았다”며 “돋보기를 껴도 글씨가 잘 안 보이고 집중이 안 돼 제일 늦게까지 썼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귀가 전 “집에 가서 더 읽어보고 공부를 단단히 해야 제대로 답을 해줄 수 있겠다”며 교육 자료를 모두 챙겨가는 열정을 보였다.

고민을 보내는 편지 발신인이 대부분 청년인 상황에서 어르신들의 답장이 세대 차이로 겉돌지 않겠느냐는 우려에 대해 조현식 대표는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조 대표는 “온기 소속 전체 1천 명의 봉사자 중 60대 이상 시니어 비율은 약 20%”라며 “청년들이 보내오는 고민의 본질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실존적 불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청년들은 인생을 먼저 살아본 지혜와 경험담을 듣고 싶어 하지만 어르신을 대면하는 방식은 부담스러워한다”며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공감을 나누는 손편지야말로 청년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깊은 위로를 건네는 최적의 창구가 된다”고 강조했다.


10년 이어온 ‘온기우편함’의 기적…지자체와 처음 보폭 맞춰

‘온기’가 일군 ‘공감’의 안전망에
연륜 담긴 조언으로 세대 벽 넘어


번개탄 막던 손으로 펜을 들다…일상 속 생명지킴의 확장

이러한 비대면 손편지는 어르신 활동가들이 그동안 현장에서 펼쳐온 일상 속 자살예방 활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동안 활동가들은 번개탄을 판매하는 편의점 등을 찾아가 직원들에게 “번개탄을 찾는 손님에게 ‘이거 왜 필요하세요?'라는 관심 있는 한마디를 건네달라”고 당부하는 등 현장 캠페인을 이어왔다.

이날 답장 활동에 참석한 한 활동가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누군가 관심을 보이면 멈칫하게 된다”며 “하지만 방 안에 갇혀 있는 고립 청년들은 길거리 캠페인이나 편의점 방문만으로는 만나기 어렵다”고 짚었다. 익명의 손편지가 바로 그런 청년들에게 닿는 중요한 생명선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손편지 답장 활동은 보건소의 게이트키퍼 교육을 이수한 어르신들이 직접 참여하기에 그 의미가 더욱 깊다. 편지 내용 중 자해나 자살 암시 등 고위험 징후가 발견될 경우, 서초구보건소의 전문 상담 및 치료 체계로 즉각 연계하는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 역할까지 겸하게 된다.

10년 전 대학생의 상상에서 출발한 온기…‘진심의 밀도’로 마음 돌본다

마음돌봄 단체인 사단법인 온기의 시작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이던 조현식 대표가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영감을 받아 “익명으로 고민을 나누고 진심 어린 답장을 받는 공간이 있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대학생 프로젝트가 모태다. 그 뒤 초기 4년 동안 조 대표는 낮에는 정보통신(IT) 분야 기획자로 일하고 밤마다 편지를 쓰며 버텼다.

초창기 고된 여정을 거쳐 현재 온기는 전국 113곳에 노란색 온기우편함을 설치하고, 매년 3만5천 통의 손편지 답장을 전달하는 비영리단체로 성장해 씨지브이(CGV) 영화관, 자립지원전담기관, 보육원 등 위로가 필요한 곳에 우체통을 설치하고 1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답장을 쓰는 ‘온기우체부’로 활동 중이다.

온기우체부들이 손편지 한 통을 쓰는 데는 평균 1시간 반에서 2시간이 걸린다. 조 대표는 “답장을 받는 사람은 종이를 펼치는 순간 자신만을 위해 오랜 시간 마음으로 작성한 ‘진심의 밀도'를 느낀다”며 디지털이 대체할 수 없는 손편지만의 정서적 치유력을 설명했다.

서초의 노란 우체통에서 피어난 생명의 답장

서초구 생명지킴 활동가 30명은 앞으로 월 1회 권역별 모임을 통해 고민 편지를 읽고, 일주일 이내에 정성 어린 답장을 완성해 발송할 예정이다.

전성수 서초구청장은 “누군가 용기를 내 보낸 편지에 손수 응답하는 따뜻한 마음이 한 사람을 살리는 희망이 될 수 있다”며 “앞으로도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생명존중문화를 확산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스마트폰 화면 속 빠른 소통이 범람하는 시대, 서초구 어르신들이 힘을 모으기로 한 따뜻한 ‘손글씨' 답장. “친구와 있어도 외롭다”며 힘들어하던 20대 청년의 우편함에 수십 년의 인생을 건너온 어르신의 다정한 안부 편지가 곧 가닿을 것이다.

글·사진 하변길 기자 seoul0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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