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공유
지난 20일 자택에서 서울&을 만난 조오남 어르신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은 수영장에 가고, 틈틈이 하모니카도 배운다.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복지관에 가고 화요일과 목요일, 토요일에는 평생학습관을 오가며 글을 배운다. 금요일에는 스마트폰 사용법도 익히고 아이들의 등하굣길 교통정리를 돕는 일자리까지 나간다.
청년 못지않게 바쁜 하루를 보내는 여든셋 조오남 어르신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하루도 쉴 틈이 없다니까. 가기 싫다 그런 생각도 없고, 갈 날이면 무조건 가야지”라며 미소를 잃지 않는 어르신은 지난 12일 관악구(구청장 박준희) 평생학습관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당당히 졸업장을 품에 안았다. 여든하나에 도전한 지 2년 만의 졸업장이었다.
가방 대신 호미와 주걱을 손에 쥐다
전남 보성군 복내면에서 태어난 조오남 어르신은 위로 오빠만 넷을 둔 막내딸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그는 연필 대신 호미를 쥐고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우리 동네 동갑내기들도 대부분 학교를 안 다니고 농사일을 도왔어. 그래도 책가방 들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부럽더라고.” 글을 배울 기회를 놓친 그는 복내면에서 농사지으며 평생 배필을 만나 결혼하고 다섯 자녀의 어머니가 됐다.
그러다 마흔일곱 살 무렵, 고향 마을이 주암댐 수몰 지역에 포함되면서 가족은 광주로 쫓기듯 이사해야 했다. 낯선 곳에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조 어르신은 곧바로 일터로 나섰다. 그가 터를 잡은 곳은 광주 학동의 ‘미도’라는 이 지역에서 꽤 유명한 일식집이었다.
무려 17년 동안 그곳에서 찬모로 일하며 주방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다. 설상가상으로 어르신이 쉰여섯 되던 해, 밖에서 고된 노동을 이어가던 남편이 지병인 혈압과 당뇨로 쓰러져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루아침에 조 어르신은 5남매를 홀로 먹여 살리기 위해 무너질 새도 없이 더욱 억척같이 주걱을 쥐어야 했다.
“미도에서는 17년 일했는데 큰 월급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집 아니면 죽을 줄 알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했어. 반찬도 만들고 김치도 담갔지. 배추쌈이 나오면 질긴 껍질은 다 걷어내고 정성껏 반찬을 만들었지. 그 덕에 반찬 맛이 좋다는 평도 들었고.” 그는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양쪽 다리를 수술하면서도 식당 일용직을 다니며 거친 세월을 버텨냈다. 배움 대신 가족을 지켜낸 거룩한 ‘살림' 미도에서 나온 뒤에도 일흔이 넘도록 광주에서 식당 ‘날일’(일용직)을 놓지 않았다. “애들이 내가 광주에 있으면 자꾸 밥 먹고 일하러만 다닌다고, 안 된다고 서울로 오라 해서 10년 전 여기 관악구로 왔어. 얼른 내려와서 일 좀 해달라고 광주에서 한동안 전화가 왔었지.” 보다 못한 자녀들의 만류로 서울로 모셔온 뒤에야 비로소 어르신의 기나긴 주방 생활도 끝났다. 어릴 적 농사일부터 광주 일식집 주방을 지켰던 시간까지 어르신의 평생은 줄곧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일로 꽉 채워져 있었다. 홀로 다섯 남매를 건사해야 했던 어머니에게, 그것은 벼랑 끝에 선 가족의 생명을 온몸으로 지켜낸 가장 거룩하고 위대한 ‘살림’이었다. 자녀 다섯 중 둘은 대학에 보내고 다른 둘은 고등학교, 다른 하나는 중학교에 보내 모든 자식을 충분히 가르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어르신은 말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은 가족을 굶기지 않기 위해 배움을 기꺼이 포기했던 눈물겨운 희생이었다. 여든 하나에 다시 잡은 연필, 꾹꾹 눌러쓴 눈부신 청춘 다섯 남매를 반듯하게 키워내고 노후가 찾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글을 모른다’는 답답함이 남아 있었다. “농사짓고 살 때는 몰랐는데 조합이나 은행 같은 데 가서 뭐 쓰라고 할 때 못 쓰니 마음이 참 안 좋더라고.”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넷째 딸의 권유로 어르신은 2년 전, 여든하나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평생학습관의 문을 두드렸다.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제일 힘든 건 아침에 배워도 돌아서면 잊어먹는다는 거. 국어공부에서 어려운 건 한글은 입에서 발음은 똑같은데 쓸 때는 받침이 여러 종류라 어렵더라고. 산수에서 몇백만, 몇천만 할 때는 0자가 많아서 어렵고 영어에서는 A, B, C, D는 쉬운데 뒤로 갈수록 P, Q, R 이런 것은 헷갈려.” 하지만 어르신의 열정은 뜨거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교엘 갔지. 일해야 하는 날에는 빠지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추워서 못 가고 미끄럽다고 안 오는 날도 있더니만 나는 그런 날에도 학교에 갔어. 밤에 책상에 앉아서 꼭 복습해봐야 생각이 나더라고.” 어르신은 침대에 앉아 사용할 수 있도록 넷째 딸이 사준 책상에 앉아 일기를 썼다. 띄어쓰기나 마침표는 빠져 있고, 받침이 헷갈려 여러 번 고쳐 쓴 흔적도 가득하다. “이게 말이 되나 안 되나 무조건 써보자고 쓴 거지. 글자 써보려고 공책 한 권 다 쓰고 또 다른 공책도 쓰고 그랬어”라며 쑥스러워했다.
“미도에서는 17년 일했는데 큰 월급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집 아니면 죽을 줄 알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했어. 반찬도 만들고 김치도 담갔지. 배추쌈이 나오면 질긴 껍질은 다 걷어내고 정성껏 반찬을 만들었지. 그 덕에 반찬 맛이 좋다는 평도 들었고.” 그는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양쪽 다리를 수술하면서도 식당 일용직을 다니며 거친 세월을 버텨냈다. 배움 대신 가족을 지켜낸 거룩한 ‘살림' 미도에서 나온 뒤에도 일흔이 넘도록 광주에서 식당 ‘날일’(일용직)을 놓지 않았다. “애들이 내가 광주에 있으면 자꾸 밥 먹고 일하러만 다닌다고, 안 된다고 서울로 오라 해서 10년 전 여기 관악구로 왔어. 얼른 내려와서 일 좀 해달라고 광주에서 한동안 전화가 왔었지.” 보다 못한 자녀들의 만류로 서울로 모셔온 뒤에야 비로소 어르신의 기나긴 주방 생활도 끝났다. 어릴 적 농사일부터 광주 일식집 주방을 지켰던 시간까지 어르신의 평생은 줄곧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일로 꽉 채워져 있었다. 홀로 다섯 남매를 건사해야 했던 어머니에게, 그것은 벼랑 끝에 선 가족의 생명을 온몸으로 지켜낸 가장 거룩하고 위대한 ‘살림’이었다. 자녀 다섯 중 둘은 대학에 보내고 다른 둘은 고등학교, 다른 하나는 중학교에 보내 모든 자식을 충분히 가르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어르신은 말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은 가족을 굶기지 않기 위해 배움을 기꺼이 포기했던 눈물겨운 희생이었다. 여든 하나에 다시 잡은 연필, 꾹꾹 눌러쓴 눈부신 청춘 다섯 남매를 반듯하게 키워내고 노후가 찾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글을 모른다’는 답답함이 남아 있었다. “농사짓고 살 때는 몰랐는데 조합이나 은행 같은 데 가서 뭐 쓰라고 할 때 못 쓰니 마음이 참 안 좋더라고.”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넷째 딸의 권유로 어르신은 2년 전, 여든하나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평생학습관의 문을 두드렸다.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제일 힘든 건 아침에 배워도 돌아서면 잊어먹는다는 거. 국어공부에서 어려운 건 한글은 입에서 발음은 똑같은데 쓸 때는 받침이 여러 종류라 어렵더라고. 산수에서 몇백만, 몇천만 할 때는 0자가 많아서 어렵고 영어에서는 A, B, C, D는 쉬운데 뒤로 갈수록 P, Q, R 이런 것은 헷갈려.” 하지만 어르신의 열정은 뜨거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교엘 갔지. 일해야 하는 날에는 빠지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추워서 못 가고 미끄럽다고 안 오는 날도 있더니만 나는 그런 날에도 학교에 갔어. 밤에 책상에 앉아서 꼭 복습해봐야 생각이 나더라고.” 어르신은 침대에 앉아 사용할 수 있도록 넷째 딸이 사준 책상에 앉아 일기를 썼다. 띄어쓰기나 마침표는 빠져 있고, 받침이 헷갈려 여러 번 고쳐 쓴 흔적도 가득하다. “이게 말이 되나 안 되나 무조건 써보자고 쓴 거지. 글자 써보려고 공책 한 권 다 쓰고 또 다른 공책도 쓰고 그랬어”라며 쑥스러워했다.
조오남 어르신이 정성 들여 쓴 일기장.
기자가 양해를 구하고 팔순이 넘어서야 난생처음 쓰기 시작했다는 일기장을 펼쳤다. 연필을 꼭 쥐고 꾹꾹 눌러쓴 투박한 글씨들을 보고 있자니, ‘한 글자 한 글자'가 꼭 어르신이 억척같이 살아낸 ‘하루' 같았다. 한 글자가 모여 한 바닥을 채웠고 한 권, 두 권이 됐다. 그 속에는 자식들을 거두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어머니의 치열함과 진심 그리고 숭고한 사랑이 가득한 듯 느껴졌다.
어르신은 지난 12일 졸업식에 12명의 동기생을 대표해 단상에 올라 졸업장을 받았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다고 졸업장을 대표로 받으라니까 좀 어색하더라고. 하지만 세상이 좋아져서 뒤늦게도 이렇게 배울 기회가 참 감사해.”
어르신의 2년은 우리에게 묻는다. ‘늦었다는 핑계로 무엇을 망설이는가.’ 삐뚤빼뚤한 일기장 속 글씨는 말없이 얘기한다. 가방 대신 주걱을 쥐어야 했던 우리네 어머니들이 참으로 고단하고도 위대한 삶을 살아왔노라고. 그러니 그 희생 위에서 자라난 우리 역시 주어진 몫의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지 않겠냐고.
글·사진 하변길 기자 seoul0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