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종점마을을 가다

조선 초기 한양 수호 의지가 서려 있는 마을

금천구 시흥2동 호압사 입구

등록 : 2017-04-2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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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압사 전경
금천01 마을버스 독산역 정류장
조선의 도읍, 한양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의 뜻이 호압사와 석구상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다. 금천01 마을버스(파란색 번호판) 회차 지점인 ‘호압사 입구’ 정류장에서 약 500~600m 거리에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지었다는 절, 호압사가 있다. 한양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석구상이 호압사에서 약 1㎞ 거리에 있다. 산 아랫마을에 있는 880년 된 ‘시흥동 은행나무’를 보고 은행나무시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호압사
호암산과 호압사

지하철 1호선 독산역 1번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돌아서 조금 가다 보면 ‘독산역’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금천01 마을버스(금천01은 파란색 번호판과 빨간색 번호판이 있는데 파란색 번호판 금천01 마을버스가 ‘호압사 입구’ 정류장까지 간다)를 타고 회차 지점인 ‘호압사 입구’ 정류장까지 간다.

‘시흥2동주민센터·동일여고’ 정류장을 지나면서 길이 가팔라진다. 호암산 자락에 난 오르막길이다. 길옆은 아파트단지다. 회차 지점인 ‘호압사 입구’ 정류장 옆도 아파트단지다. 도로 건너편에 호압사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호암산의 원래 이름은 금주산이다. 관악산에서 이어지는 지맥이 삼성산을 거쳐 금주산으로 이어진다. 산의 형국이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라 일렀다.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 줄기가 향하는 쪽이 조선의 도읍인 한양이다.

호압사 뒷산에서 본 호압사 전경
조선 개국과 관련된 인물 중 한 명인 무학대사는 그 산세를 흉한 기운으로 봤다. 게다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태조 이성계는 반은 호랑이 형상이고 반은 이상한 동물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궁궐을 무너뜨리는 꿈을 꾸게 된다. 무학대사는 이를 나쁜 징조로 보고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에 호압사라는 절을 지어 호랑이의 기운을 눌렀다고 전해져온다.

호압사의 창건 설화는 하나 더 있다. 조선 시대 태종 7년(1407년)에 절을 창건할 당시 태종이 ‘虎壓’(호압)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조선의 도성인 한양을 향해 달려가는 호랑이 형국인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절을 짓고 호압이란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는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함께 내려온다.


실제로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에 사는 호랑이에 의한 피해가 심해서 호랑이를 누른다는 의미로 호압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불영암 주변에 있는 석구상
석구상

호암산과 호압사에 얽힌 여러 이야기에는 조선 개국 초기에 도읍지 한양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담겼다. 호압사에서 서쪽으로 약 1㎞ 거리에 있는 석구상도 그런 이야기를 품고 있다.

석구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에는 해태상으로 알았다. 조선 시대 한양도성을 건설할 당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관악산 줄기인 호암산에 석구상을 만들어 경복궁 광화문 앞 해태상과 마주 보게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실제로 현재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방향이 광화문 방향이기도 하다.

석구상에서 약 50m 정도 가면 불영암이 나온다. 불영암에는 한우물이라는 연못이 있다. 한우물은 호암산성 안에 있던 두 연못 중 하나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호암산 성지 발굴 조사에서 연못 2개와 건물지 4개가 확인됐다. 조선 시대 한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다.

우물지 근처에서 개 모양의 동물상(석수상)이 발견됐는데, 조선 시대 한양에 화재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우물을 발굴·조사할 때 ‘石拘池’(석구지)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됐다. 그래서 개 모양의 동물상을 돌로 만든 개의 상으로 보기도 한다.

시흥동 은행나무
시흥동 은행나무와 은행나무시장

불영암 마당에 있는 이정표 ‘시흥동(호암1터널)’ 방향으로 간다. 산을 내려가다가 시흥5동 방향 이정표를 따르면 범일운수 종점 부근으로 길이 연결된다.

범일운수 종점에서 서쪽으로 약 300m 거리에 시흥동 은행나무라고 알려진 88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 그루는 도로 가운데 있고 다른 한 그루는 조금 떨어진 인도에 있다. 금천01 마을버스 정류장 중 한 곳이 시흥동 은행나무이기도 하다.

시흥동은행나무와 선정비
도로 가운데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는 조선 시대 시흥 현령을 지낸 사람들의 선정비가 있다. 인도에 있는 은행나무 앞에는 조선 시대 동헌 관아 터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묻힌 능을 찾아갈 때 행궁으로 사용했다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은행나무시장 입구
시흥동 은행나무가 있는 도로 한쪽에 은행나무시장 어귀가 보인다. 긴 골목에 장터가 형성됐다. 공식적인 시장 이름도 없었다. 골목에 시장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냥 ‘골목시장’이라고 했다. 시장 골목에서 장사를 하는 아줌마가 몇 해 전부터 은행나무시장이라고 이름을 바꿔 말하면서 이 이름을 얻게 됐다고 알려준다.

생선가게, 채소가게, 반찬가게, 과일가게, 두부가게 등이 골목 양쪽으로 줄지어 있다. 시장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 손에 비닐봉지가 몇 개씩 들려 있다.

시장 골목 식당에 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주인아줌마에게 시장 이야기를 들었다. 주변에 아파트가 많지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대형마트를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저녁밥을 준비할 시간인데 시장에 손님이 많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시장 골목에서 떨이로 산 오징어와 과일 몇 개를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880년 된 은행나무 아래 세워진 조선 시대 시흥 현령들의 선정비가 을씨년스러웠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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