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미 대사관저는 ‘한미 공조’의 참된 상징물이었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㉓ 정동 하비브 하우스

등록 : 2020-11-26 15:01 수정 : 2020-12-0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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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재 본 해리 해리스 미국 대사

서울에서 가장 방문 힘든 곳 필자 초청


미 대사 필립 하비브 이름 딴 대사관저

한국 사랑한 하비브 대사 ‘한옥’ 주장에

‘모든 미 대사관저는 미국식’ 전통 극복


한옥 스타일에 미국 건자재로 내부 공사


두 나라 건축전문가·목재장인 힘 합쳐

미 테네시주 전나무로 목조 기둥 세워


동네 이발소 이발 즐기는 해리스 대사

함께 나눈 양탕국은 21세기 환상의 맛

커피는 마법의 음료다. 졸음과 미몽에서 깨어나게 해줄 뿐 아니라 코로나19의 지루하고 힘겨운 시간을 견디게 해주니까. 그 커피가 또 한 번 마법을 부렸다. 늦가을의 황금색 잔치가 끝나가던 11월의 어느 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미국 대사관저에서 저희 대사님과 단독으로 커피 한잔 생각 없으신가요?”

물론 진정한 여행작가라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 더 주목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경청한다. 서울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곳인 미국대사관저, 그것도 단독 초대라니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다만 지금 나는 영향력 있는 현역 언론인도 아니고, 시이오(CEO) 신분도 아닌, 골목길을 걷는 여행작가일 뿐인데 어찌 된 영문일까?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한겨레> 영문판을 통해 <서울&>에 연재 중인 서울 골목길 시리즈 ‘공감재생 골목여행’을 읽다가 나를 초청했다는 설명이었다.

주한미국대사관저는 정동길에 있다. 그곳은 구한말 서울에 ‘양탕(洋湯)국’이라는 이름의 커피 문화와 서양식 라이프스타일이 함께 들어온 곳이며, 그 시작점 가운데 하나가 미국대사관저이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양탕국’을 마실 기회가 생긴 것이다. 짐짓 태연한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와이 낫(Why not)? 왜 싫다고 하겠어요?”

대사관저에 가기 위해서는 시청역에서 덕수궁 뒤편으로 돌담길을 끼고 걸어야 한다. ‘도시는 시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던 미국 작가 아나톨 브로야드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곳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된다. 돌담길과 휴먼스케일에 적당한 도로 폭 덕분에 정동이라 쓰고 아날로그적 감성의 공간이라 읽게 한다. 경찰 경비를 지나 엄격한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해리 해리스 대사가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아서인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는 우선 관저 내부 정원을 둘러보자고 제안했다.

해리 해리스 대사와 손관승 작가

대사관저는 1882년 한국이 서방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처음 부임한 미국 공사가 매입한 건물과 주변 대지로 이뤄져 있는데, 낮은 언덕 위에 두 채의 전통가옥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뤄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웅장하지 않고 담백하여서 오히려 더 매력적이었다. 야외 리셉션용으로 깔끔하게 다듬어진 정원과 옥외 테니스장과 수영장, 그리고 구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정동공원 방향에는 안뜰이 있어 채소도 심는다.

화재와 재앙을 막아주는 해태가 세워져있다

정문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는 작은 한옥 건물은 ‘공사관 건물’(Legation House)로 불린다. 1883년 지어진 것으로 공사관을 거쳐 영사관으로 사용되다가 2004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으며 영빈관으로 사용된다. 이 건물 왼쪽에 기와지붕 아래 목제 기둥이 인상적인 좀 더 큰 한옥 건물이 우뚝 서 있으니 이곳이 대사관저인 ‘하비브 하우스’다. 화재와 불운한 기운을 다스린다는 해태 석상 두 개가 건물 앞을 지키고 있다. 대문에는 브루니 브래들리 대사 부인과 해리 해리스 대사 이름이 새겨진 문패, 그 옆에는 ‘필립 하비브의 이름을 기린다’는 큼직한 기념동판이 새겨져 있다. 왜 이곳을 하비브 하우스라 부르는 것일까?

하비브 하우스로 들어가는 문에 선 해리스 대사

필립 하비브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했으며, 옛 건물이 낙후돼 대사관저를 새로 짓게 되자 역사적 의미와 주변 경관을 고려하여 한국 전통양식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해외 대사관저는 미국식으로 건축하는 게 국무부의 오랜 전통이었기에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지만, 하비브는 한-미 특수관계와 덕수궁 옆이라는 상징성을 들어 결국 관철해냈다. 이 건물은 1976년 완공됐기에 주역인 하비브는 정작 새 공관을 이용할 기회가 없었다. 하비브 하우스라 명명하는 데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의 공이 컸다고 한다.

“이곳은 가장 한국적인 전통 스타일 건물에 미국에서 가져온 건자재로 내부를 공사해 한-미 공조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입니다. 올해는 이 아름다운 관저를 만든 주역인 하비브 대사님의 탄생 100주년이니 더욱 뜻깊지요.”

해리스 대사는 힘을 주어 강조한다. 한국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본국의 반대를 이겨낸 정신, 그리고 해리스 대사를ㅁ비롯한 주한 미국대사관 사람들의 전임자 공적을 기리는 진심 어린 태도에서 미국의 보이지 않는 저력을 느낀다. 전통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탁 트인 구조와 목조 기둥, 우아하게 위로 솟는 처마의 곡선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전통미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미국 테네시와 오리건주의 더글러스 전나무를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 두 나라 건축 전문가와 목재장인들이 힘을 합쳐 만든 이 건물은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끼워 맞추는 기법으로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앙 리셉션실에는 커다란 굴뚝에 편안할 ‘영(寧)’ 자가 예술적인 문양으로 새겨져 있으며, 피아노가 놓인 관저 창문 바깥으로는 경주 포석정을 본뜬 아름다운 연못이 있다.

하비브 하우스 건축 당시를 새겨놓은 목재

관저는 작은 미술관이다. ‘하비브 하우스 아트북’이라는 작은 책자가 있을 정도로 다양한 그림이 걸려 있는데, 영구 소장품과 기증받거나 임시 대여한 한국 작가들 작품이 다수를 이룬다. 현관 입구에 걸린 성조기와 태극기가 새겨진, 하와이 출신 작가의 ‘같이 수영하자’라는 그림을 특히 강조했다. 해리스 대사는 동네 이발소에서 이발하고, 광장시장을 가거나 요리하는 장면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저는 요리하는 시간이 즐거워요. 얼마 전에는 젊은 한국인 셰프와 함께 음식을 만들었지요. 개인적으로는 비빔밥과 삼계탕, 라면이 정말 맛있습니다.”

인터뷰하느라 정작 커피는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했지만, 21세기의 환상적인 양탕국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진 전통 도자기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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