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정조의 꿈 만났던 나무들, 그 아래에서 쉼을 찾다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④ 금천구 시흥동의 은행나무와 향나무, 호암산 호압사의 느티나무와 잣나무 숲

등록 : 2020-08-20 14:46 수정 : 2021-04-1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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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 쉬던 관아 880년 은행나무

이제 나무 아래는 동네 할머니 놀이터

탑동초등학교 부근의 570년 향나무도

장바구니 든 아줌마와 일상을 나눈다

880여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 세 그루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가는 정조 임금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 나무 그늘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쉰다. 570년 넘은 향나무가 낯설게 보이는 조용한 주택가 골목길에서 호암산으로 향한다. 호암산 호압사에 520여 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절 아래 잣나무 숲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숲의 향기에 젖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이 나무와 숲이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다.

금천구 시흥동 880여 년 된 은행나무. 이 나무 아래 할머니들이 매일같이 모여 시간을 보낸다.

880여 년 전 은행나무 거리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에 ‘으능정이 거리’가 있다. ‘으능정이’는 은행나무가 있는 동네나 길목을 부르던 이름이다. ‘으능정이’의 ‘으능’은 은행의 발음이 변형된 말이다. 시흥동에 880여 년 전 은행나무 거리가 있다.


시흥동 은행나무시장 초입 오거리 부근에 880년 넘은 은행나무가 세 그루 있다. 세 그루 가운데 도로 가운데 있는 나무가 가장 작다. 높이 8.5m, 둘레 6.1m다. 인도에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 14m, 둘레 8.6m로 세 그루 중 가장 크다. 그 그늘에 할아버지들이 많이 모인다. 높이 10.8m, 둘레 7.3m인 골목길 은행나무의 그늘은 할머니들 차지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매일 그렇게 900년이 다 돼가는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골목 은행나무 그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사이에 앉아 옛이야기를 들었다. 이 마을에서 60~70년 정도 살았다는 한 할머니가 은행나무가 있는 큰 도로는 옛날에는 냇물이었고 그 옆은 논이었단다. 냇물에서 빨래도 했다는 할머니 말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굽어보는 개울에서 빨래하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떠올려 보는 사이에, 옆에 앉은 조금 젊어 보이는 할머니가 물이 더러워 빨래는 못했다고 말을 섞는다. 아마도 나이 든 할머니 때까지 그 냇물에서 빨래했나보다 하며 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사실 은행나무가 모여 있는 이곳은 조선시대 금천현(시흥현)의 동헌 관아가 있던 곳이다. 넓은 도로(금하로) 옆 인도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 동헌 관아 자리를 알리는 푯돌과 안내판이 있다. 현령들이 거주하던 공간, 말이 있던 ‘마방’, 아전들이 살았던 ‘아전골목’, 동헌의 육방 중 하나인 병방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병사 터’, 현령들의 공덕비가 있던 ‘비석거리’라는 지명이 전해진다. 도로 가운데 있는 은행나무 옆에 시흥 현령 선정비가 몇 개 남아 있다.

금천현(시흥현) 관아는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갈 때 쉬었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 임금이 머물렀던 때에도 세 그루 은행나무는 이곳에 있었다. 어쩌면 은행나무 그늘에서 정조 임금은 발걸음을 멈추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 나무 아래에서 쉬는 것처럼….


570년 넘은 향나무가 있는 마을

880여 년 된 은행나무 거리에서 멀지 않은 탑동초등학교 부근 주택가, 탑골로13길 골목에 570년 넘은 향나무가 있다. 향나무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도 500년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람들은 이곳에 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탑과 향나무 앞에서 1년에 한 번 마을의 평온과 주민들의 안녕을 빌며 제를 지냈는데, 타지에서 이 마을로 이사 온 사람들이 늘어나면서부터 ‘마을제’의 맥이 끊겼다.

처음에는 향나무와 삼층석탑이 골목길에서 낯설었다. 우편배달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향나무 앞을 지나가고, 조금 뒤 장바구니를 든 아줌마가 느린 걸음으로 향나무 앞을 지나 집으로 간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대문 앞에서 서성이는 아이는 자꾸만 향나무가 있는 골목 쪽을 바라본다. 향나무와 석탑이 오래전부터 그렇게 조용한 주택가 골목의 일상에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 풍경도 고즈넉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탑골, 탑곡, 탑시골, 탑동 등으로 불렸다. 탑이 있는 골짜기(동네)라는 뜻이다. 현재 주변 길 이름도 탑골로다. 향나무와 탑이 있는 골목에서 탑골로로 나와서 벽산아파트 단지 쪽으로 올라간다. 터널을 이룬 가로수와 도로 옆 산기슭을 보면 이 마을이 골짜기라는 느낌이 든다. 눈에 보이는 아파트와 다닥다닥 붙은 건물이 없다고 생각하면 호암산으로 올라가는 산기슭 골짜기의 형국이 그려진다. 호암산에는 호압사가 있다.

탑골로를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면 큰 도로인 호암로를 만난다. 길 건너편에 호압사로 올라가는 입구가 보인다. 호압사에는 520여 년 된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다. 호압사 주차장에서 절 마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다 올라서면 느티나무 두 그루가 반긴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나무는 지지대에 가지를 얹고 있다.

금천구 시흥동 570년 넘은 향나무.


절 마당의 520년 느티나무와 절 아래 잣나무 숲

호압사를 한눈에 보기 위해 호암산으로 오른다. 호압사 포대화상을 지나 호암산 등산로를 따라가다가 길 왼쪽 크고 작은 바위가 있는 산비탈로 올라가면 절벽 위 넓은 터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호압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절이 푸른 숲에 깃든 둥지 같다.

새 왕조를 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새 나라의 도읍을 한양으로 정할 무렵 이상한 꿈을 꿨다. 반은 호랑이, 반은 이상한 동물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나타나서 한양의 궁궐을 부수는 꿈이었다. 꿈에서 이성계는 도인에게 괴물을 물리치고 궁궐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물었고 도인은 호랑이 꼬리를 제압하라는 말을 건넸다. 이성계에게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한양 주변의 산을 돌아다니며 지세를 살피던 중 호암산에 이르렀다. 한양이 있는 북쪽을 향해 달려나가는 호랑이의 형국인 호암산에 절을 지어 그 기운을 누르려 했다. 무학대사의 말에 따라 이성계는 이곳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마을에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커서 호랑이를 누른다는 의미로 호압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520여 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는 절을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은 것으로 보인다. 새 왕조의 문을 열고 나라의 기틀을 세워야 했던 엄중한 시절, 흉몽에서도 길운을 찾으려던 이성계의 마음을 엿보았다. 느티나무 두 그루를 절 마당에 심은 숨겨진 이야기도 있을 법한데, 전해지는 내용이 없어서 안타깝다.

호암산에서 내려와 절 아래 ‘호암늘솔길’로 들어섰다. 호압사부터 절 아래 잣나무 삼림욕장을 지나 호암산 폭포까지 이어지는 약 1㎞ 정도 되는 숲 오솔길을 호암늘솔길이라고 부른다. 언제나 솔바람이 부는 길이라는 뜻이다. 산기슭에 난 오솔길과 데크길을 걷는 동안 숲의 향기를 느껴본다. 특히 잣나무 삼림욕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 좋은 곳이다.

잣나무 삼림욕장 아랫마을인 벽산아파트 일대는 1960년대 말 서울역 주변 도심 정비 사업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정착한 달동네였다. 달동네 뒷동산이 호암산이었다. 78년, 84년, 89년 호암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났다. 산사태를 복구하고 녹화사업을 펼치며 나무를 심어 지금 같은 푸른 숲이 됐다. 그 숲을 오가는 사람들도 푸르다.

500년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호압사 절 마당에 있다.

호암늘솔길 잣나무 삼림욕장.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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