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나무는 수백년 살아, 계곡 아이들 ‘깔깔’ 소리에 웃는다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① 도봉구 서원말, 무수골, 원당마을

등록 : 2020-07-09 15:15 수정 : 2021-04-1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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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텀벙 소리에 잠 깬 도봉천은

17세기 기생 이매창 사랑 떠올렸을까

경복궁 중건 당시 베어질 위기 만났던

방학동 원당마을의 500살 된 은행은

마을 주민 간청에 살아난 것 기억할까


뒷동산은 어린 시절 세상의 반이었다. 참나무 숲에서 잡은 사슴벌레는 보물 1호였다. 귀신이 나온다던 당산나무에 오르는 ‘배짱 대결’을 하다보면 어디선가 검은 고양이가 나타나 머리카락이 쭈뼛 서곤 했다. ‘Y’ 자로 생긴 나뭇가지로 새총을 만들어 숲을 헤집고 다녔다. 그날들이 행복했다. 서울에 남아 있는 숲과 나무를 찾아보기로 했다. 오래된 나무에는 이야기가 많고 마을 숲에는 아직도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도봉구 도봉동과 방학동으로 이어지는 도봉산과 북한산 기슭 마을에 수백 년을 살고 있는 나무를 보며 옛사람의 발자취를 읽는다. 옛이야기 남은 곳에 한여름 더위를 씻는 아이들 물장구 소리, 웃음소리 울리니 수백 번 지나간 여름의 이야기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아파트 빌딩 숲 사이 푸른 숲은 사람들 마음까지 맑게 해준다.


도봉천 물가의 나무들

도봉천 계곡. 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도봉서원이 있던 곳이 나온다.

도봉산탐방지원센터로 가는 길, 도봉천 개울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자맥질한다. 어른들은 물가에서 과일을 먹으며 쉬고 젊은 아빠는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작은 배에 태우고 개울을 오르내린다.

물가에 덩그러니 놓인 조형물 하나, 조선시대에 뜨겁게 사랑했던 유희경과 이매창의 사랑시가 새겨진 시비다. 17세기 초 유희경은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놀고 있는 도봉천 어디쯤 별장을 짓고 살았다. 그가 사랑한 이는 조선시대 3대 여류 시인 중 한 명인 이매창이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으로 시작하는 이매창의 시비 옆에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로 끝나는 시를 남긴 유희경의 시비가 나란히 놓여 있다.

도봉천 개울가에 있는 유희경과 이매창 시비.

광륜사 쪽으로 가다보면 길 왼쪽 옆 풀밭 초입에 도봉동문(道峰洞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도봉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알리는 것이다.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다. 그곳에는 서원 아랫마을, ‘서원말’이 있었다. ‘서원말’을 알리는 푯돌이 길가에 놓였다.

광륜사 앞 길가에 200년 넘은 은행나무와 250년 넘은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다. 광륜사 자리는 조선 말 헌종 임금의 어머니 신정왕후의 별장이 있던 곳이었다. 흥선대원군도 그 별장에서 쉬곤 했다. 흥선대원군의 발소리를 두 나무는 기억할 것이다.

길 바로 옆 계곡 푸른 숲 맑은 물을 보고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고 마음이 깨끗해진다. 길 오른쪽에 김수영 시비가 있다. 그 뒤가 도봉서원이 있던 곳이다. 빈터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250년 넘게 살고 있는 보호수다. 그 앞 계곡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계곡 물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1700년 김수증이 새긴 글씨다. 고산앙지란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김수증이 조광조를 위해 새긴 것이라고 추측한다. 도봉서원은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숲과 계곡과 논이 있는 500년 넘은 마을

무수골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

옛 ‘서원말’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무수골이 나온다. 무수골은 1477년(성종 8년) 세종의 17번째 아들인 영해군의 묘가 조성되면서 생긴 마을이다. 당시 마을 이름은 수철동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무수동으로 바뀌었다. 무수동(無愁洞), 근심이 없는 마을이란 뜻이다.

무수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도봉초등학교 앞을 지난다. 냇물이 암반 위를 흐른다. 시골 시냇가 풍경이다. 세일교 아래 시냇가 모래밭에 아이들이 앉아 물장난한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으로 시작하는 동요처럼 아이들이 모래장난을 한다. 집 벽 바로 아래로 냇물이 흐른다. 난향별원 담장 옆길은 숲이 만든 터널이다. 그 길을 빠져나가면 논이 사람들을 반긴다. 갑자기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논둑길 옆이 계곡이다. 옛 시골 마을 모습 그대로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계곡에서 아이들이 논다. 한 아이가 자기 키보다 높은 곳에서 웅덩이로 뛰어내리려고 한다. 겁은 나는데 한번쯤 멋지게 뛰어내리고도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마음을 먹은 아이는 멋지게 뛰어내렸고,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모두 즐거워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500년 넘은 마을의 계곡 숲에서 선선한 바람이 인다.

이 마을에도 250년 넘은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그 나무가 있는 곳 주변 계곡과 숲에서 머물다 간다. 돌아가는 길, 논둑에 앉아 벼 포기 사이를 오가며 노는 올챙이를 보았다. 올챙이 두 마리가 논둑길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꼬리를 친다.


아파트 빌딩 숲 사이 사람을 품은 녹색지대

무수골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방학동 원당마을이 나온다. 조선시대 세종 임금의 딸인 정의공주의 무덤과 연산군의 무덤이 있지만, 그보다 유명한 건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다.

1968년 서울시 보호수 제1호로 지정됐다. 당시에는 수령이 830여 년 된 것으로 추측했는데, 근래 들어 조사한 결과 550년 정도 됐다고 한다. 2013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수 지정을 해지하고 서울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했다.

조선 말 경복궁 증축 당시 이 나무를 베어 쓰려고 했는데 마을 주민들이 흥선대원군에게 간청하여 살아남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대감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당샘 옆 ‘방학동 은행나무’.

은행나무 옆에 원당샘이 있다. 이 샘은 600여 년 전 파평 윤씨 일가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쓰던 우물이다. 지금도 계속 쓰고 있다. 샘에서 흐르는 물이 물길을 따라 연못으로 흘러든다. 연못가에는 수양버들이 낭창거리고 연못에는 수련이 생기를 띤다. 연못 앞 작은 소나무 숲은 마을 사람들의 쉼터다. 돗자리에 앉은 젊은 부부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그 옆 풀밭을 뛰어다니며 논다. 자전거를 타고 솔밭 둘레길을 달리는 아이들은 폭염도 즐거운가 보다.

숲속애(愛)에서 마련한 숲속 놀이터.

원당샘 주변 작은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숲속애(愛)’가 있다. 뜻을 같이하는 마을 사람들이 숲에 놀이터를 만들어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게 했다. 숲 모래밭에 삽이 널렸고 통나무 놀이시설에는 잠자리채가 놓였다. 나무로 만든 움집은 아이들 상상 속 보금자리일 것이다. 아이들은 마음을 다해 논다. 해맑은 웃음에 숲이 환하다. 방학3동 주민센터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구간은 발바닥 공원이다.

발바닥 공원 작은 연못.

방학3동과 쌍문4동이 발바닥 공원에서 만난다. 방학천 주변에 작은 숲을 만들어 공원을 꾸몄다. 지압보도, 맨발황톳길 등 맨발로 걷는 길도 있다. 아파트 단지 사이 좁고 긴 초록색 띠, 그 작은 숲에 마을 사람들이 모인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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