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자 하멜’의 자유의지 그리며 광화문 뒷길을 걷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⑨ 세종문화회관 뒷골목

등록 : 2020-04-2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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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모두가 ‘유배된 자’가 된 지금

효종 때 억류된 하멜 일행 서울 삶 생각

몇 번을 고국 가려 탈출 시도했던 그들

네덜란드 대사관 향하니 더욱 생각나

재택근무는 현대의 위리안치(圍籬安置)다. 조선시대 정치범들을 유배 보낸 뒤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둘러쳐서 그 안에 가두는 형벌을 말하는데, 인조반정으로 실각한 광해군의 제주도 유배지가 대표적인 위리안치 장소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집안에 갇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코로나19처럼 태풍도 느닷없는 곳으로 인생을 내동댕이친다. 1653년 태풍에 떠밀려 제주도에 왔던 헨드릭 하멜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와 동료들은 공교롭게도 광해군의 제주도 위리안치 장소에서 살았다. 그나마 주거여건이 양호한 광해군 유배지에서 살게 된 것은 와인 덕분이다. 8월19일의 하멜 일기를 읽어보자.

“한 통의 붉은 포도주를 들고 가서 우리가 바위틈에서 발견한 회사용 은술잔에 따랐다. 그들은 포도주를 맛보더니 좋은지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는데, 나중엔 대단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태풍에 실려온 하멜 일행은 한반도에 최초로 와인을 선물했다. 스페인산 와인이었으며 언어가 통하지 않던 상황에서 훌륭한 소통의 수단이 되었다. 1720년 조선 여행자 이기지가 북경의 서양 신부들과 10번이나 만나 최초의 와인 시음 소감을 남기고 포도주 레시피를 기록하지만, 하멜의 이 기록은 이보다 67년 전이었다. 하멜 일행이 제주도를 떠나 서울에 도착한 것은 1654년 6월26일이다. 하멜과 그 일행의 서울 생활은 어떠했을까?

“박연이 데려온 사람들이 지금 입경하여 사역원(司譯院)에 숙소를 정하라고 명했습니다. 오늘부터 급료가 계산되며, 대부분 호위 임무를 맡는 병사로 임명됐습니다.”

세종문화회관 후문 쪽 사역원터 표석

당시 정무를 담당하던 비변사의 업무를 기록한 책 <비변사등록>에 남아 있는 기록이다. 사역원은 외국어 통번역을 담당하던 곳으로 적선방에 있었다. 적선방은 지금의 적선동 부근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6번 출구로 나와 외교부를 지나서 세종문화회관 부근까지 걸어오면 사역원 터 안내 푯말이 보인다. 하멜 일행이 서울에서 처음 수용됐던 곳이다.

“우리는 처음 한동안 구경꾼 때문에 숙소 부근의 골목길을 거의 나다닐 수가 없었고, 숙소에 있어도 구경꾼들은 우리에게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으려 했다. 마침내 훈련대장은 자기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초청하면 따라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멜 일행이 처음 서울에서 살던 세종문화회관 부근

17세기 중반 세종문화회관 주변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35명의 서양 거한 모습에 마치 동물원 구경하듯 이목이 쏠린 것이다. 하멜은 조선을 기록한 최초의 서양인 골목길 여행자이기도 하다. 앞서 네덜란드 사람 박연(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이 하멜보다 26년 전 조선에 붙잡혀 살았지만, 기록을 남겼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당시 귀화하거나 본국에서 도망쳐온 중국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하멜 일행은 한동안 그 중국인 집으로 분산 수용된다. 그러나 집주인이 날마다 땔감을 구해오라고 강요하자 난파한 배에서 얻은 녹비(사슴 가죽)를 팔아 두세 사람씩 살 수 있는 작은 집을 여러 채 사서 독립하기에 이른다. 네덜란드인 특유의 절약 정신과 독립심이 드러난다.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배치되는데 일명 훈국(訓局)이라고도 불리던 군대 조직이다. 처음에는 화포를 다루는 능력을 살리고자 했지만 곧 왕의 가마를 수행하는 호위병 역할로 바뀐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에 타버려 효종 시절에는 창덕궁과 경희궁을 오가며 거처했다고 하는데, 훈련도감은 경희궁 옆에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옆 대우건설 본사가 있던 크레센도 빌딩 앞에 훈련도감 기념푯말이 있다. 하멜 일행 중 한국어를 가장 잘해서 귀국 뒤 니콜라스 빗선이라는 저술가와 인터뷰한 마테우스 에보켄에 따르면 이들은 왕에게서 음식과 술도 하사받았다.

“조선 사람들은 붉은 음료를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포도주처럼 맛이 있고, 마시면 취해 버린다. 국왕은 궁정에서 그것으로 우리 네덜란드 사람을 한 번 대접해준 일이 있다.”

붉은 음료가 복분자술이었는지 혹은 진달래술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들은 왕 앞에 불려나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야 했고 퉁소도 불어야 했다. 이들은 호패를 차고 다녀야 했다. 흥미로운 것은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후 조선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해외 경험이 있던 군주가 바로 효종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병자호란의 여파로 인질 자격이었지만,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패권이 넘어가던 숨 막히던 광경을 8년 동안 육안으로 직접 목격한 왕이었다. 그런 까닭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멜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이들의 서울 생활은 1년9개월 만에 끝난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탈출시켜달라고 사신 앞에 소동을 일으킨 헨드릭 얀스 보스와 헨드릭 얀스 때문이었다. 당시 <승정원일기>에는 각각 남북산(南北山)과 남이안(南二安)으로 기록된 점이 이채롭다. 나머지 일행 대부분에게도 남씨 성이 주어졌는데 남만(南蠻·남쪽 오랑캐)족이라는 뜻이었다. 1656년 3월 서울을 떠나 멀리 전라도 지방으로 전출된 하멜은 결국 13년 28일 동안 한반도에 체류하게 된다. 한편 강나루에서 이들과 눈물의 작별을 하였던 벨테브레이 즉, 박연은 조선 여자와 결혼해 1남1녀를 낳고 이국땅에서 곡절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의 후손은 원산 박씨로 이어져 유명 대학 교수도 배출했다. 에보켄의 증언에 따르면 하멜 일행 중 일부도 조선 여자와 살았던 것 같다.

하멜 일행 근거지였던 곳의 김앤장 등 로펌 건물

하멜의 활동 무대는 세종문화회관 뒤편과 광화문 일대였다. 하멜 자취 따라 걷기는 광화문역 1번 출구,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포시즌호텔을 돌아 새문안교회 방향으로 향한다. 옛 대우건설 앞의 훈련도감 푯말을 보고 길 건너,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작품 <해머링 맨> 뒤쪽 길로 걸어간다. 정동 옛 러시아 공사관으로 넘어가는 계단이 있으며, 그곳에 하멜이 그토록 열망하던 고국의 자취, 네덜란드 대사관이 있는 까닭이다. 억류된 자의 자유를 향한 길이기도 하다.

애석하게도 서울 그 어느 곳에서도 하멜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복원하고 재생해야 할 것이 꼭 건물만일까? 이토록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자원에 왜 눈 감고 있는 걸까? 사람들의 뜨거운 인생 이야기가 없는 골목길은 차가운 오브제일 뿐이다. 혁신이 절실하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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