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많았을 경희궁터 보며 ‘코로나 이후’ 봄을 그리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신문로

등록 : 2020-02-27 14:59 수정 : 2020-02-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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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사태에 한산한 역사박물관

전시된 전차 사진 빛바랜 모습에 애잔

그래도 그대, 빛나는 한때가 있었으니

시네큐브 앞 ‘해머링 맨’ 힘찬 망치질에

따뜻한 계절 다시 찾아올 것 희망 가져

우울한 계절이다. 한 해를 시작할 때는 의욕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지만 전혀 뜻밖의 일들이 벌어져 낙담하게 한다. 당황을 넘어서 좌절감에 빠지기도 한다.

일주일 내내 사람들 앞에서 강연하던 나 역시 생활리듬이 확 바뀌었다. 그렇다고 매일 실내에만 갇혀 지내다보면 자칫 지독한 무력감에 감염될 수 있다. 이럴 때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훌쩍 넘는 여행도 좋다. 오래전의 여행기를 읽으며 지금의 시공간에서 잠시라도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다시 읽다가 독일 베를린에서 전차를 목격한 소감에 눈길이 꽂혔다.


“시내에 전차가 운행되고 있다. 전차란 철로 위에 오가는 차량이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말에게 끌게 하지도 않으면서 오가는 전기로 조종하는 차다.”

서울의 전차

심기일전할 겸 추억의 전차를 보러 가볼까? 신문로 입구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서울의 전차’ 특별전이 그곳에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 앞 대로변에는 도시락을 깜빡한 아들을 급히 부르는 엄마의 조형물과 함께 ‘381호’ 전차가 서 있다. 1930년부터 1968년 11월까지 실제로 운행했던 ‘381호’ 전차라고 한다. 나는 전차를 체험한 거의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충정로에 있는 미동초등학교에 가기 위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몇 번 전차를 이용해본 적이 있다. 어쩌면 저 전차가 내가 탔던 바로 그 전차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역사박물관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 박물관 실내가 한산하다. 서울에서 전차는 1899년 첫 개통을 했다. 전차라는 새로운 기계가 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흥인지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8대의 전차가 함께 도열해 있는 흑백사진은 빛바랜 풍경처럼 애잔하다. 전차는 곧 이 땅의 근대화 시작을 의미한다. 전시를 보다가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했다.

“여성도 남성과 함께 전차를 탈 수 있다.”

지금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홍보 문구였던 모양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남녀유별의 사회를 살던 사람들에게는 꽤 낯선 제도였으리라. 전차가 개통된 이후 이동의 자유성도 가져왔지만 동시에 시간의 규칙성도 시작된다. 농경사회의 느긋함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시간에 맞춰서 도시민의 규칙성을 학습하게 됐다. 현대인이 겪는 스트레스와 경쟁도 불가피하게 함께 왔다. 현대 서울의 직장인들이 느끼는 시간 감각은 불과 120년 정도에 불과하다.

소설가 염상섭(1897~1963)은 서울의 ‘플라뇌르’(flaneur·산보객)였다. 19세기 도시 산책자 발자크와 보들레르가 느긋하게 걸으며 근대화된 프랑스 파리의 이면을 들여다본 것처럼, 혹은 1910년대 급격하게 변하는 일본 도쿄의 ‘골목길 산책자’라 불린 소설가 나가이 가후(1879~1959)처럼, 염상섭도 전차로 인해 벌어지는 서울의 또 다른 측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1923년 <개벽>에 발표한 그의 글이 이를 말한다.

“공진회는 경성전기회사의 배를 불려주었다. 그리하여 북촌에도 전차바퀴 소리가 가까이 들리게 되었다. 그 덕에 해태는 하룻밤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속도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서울이 팽창되면서 전차의 느린 속도는 오히려 민폐가 됐다. 결국 1968년에 서비스를 종료하니 정확히 70년의 삶을 살았다. 전시를 본 뒤 1층 구내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한잔 하기 좋지만, 상쾌한 공기가 필요해서 문을 열고 박물관 중정(中庭)의 너른 공간으로 나갔다. 화창한 봄날이라면 이곳에서 샌드위치나 도시락을 먹기에도 좋다.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이는 고양이 두 마리가 양지에서 졸고 있다. 바깥과 달리 이곳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

안쪽으로 더 걸어가니 수목이 우거진 산책로와 경희궁 터가 나온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있어 동궐이었고, 그 반대 방향에 있는 경희궁은 서궐이었다. 경희궁의 침전(왕이 잠자던 곳)을 융복전이라 부르는데 이곳에서 숙종과 영조가 세상을 하직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왕궁을 해체했다가 현대에 복원해서 그런지 옛 정기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입구에 서 있는 푯말을 읽어보았다.

“이곳은 본래 경희궁이 자리했던 곳으로 1946년부터 서울중고등학교가 자리 잡아 1980년 서초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터로 ‘서울고인’의 요람이다.”

경희궁 뒤 산책로에서 바라본 서울시

그렇다. 이 땅의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과거의 명문 서울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강남 개발에 따라 학교는 이전하고 그 자리가 궁궐로 다시 돌아왔다. 궁의 뒤편 아산정책연구원 쪽으로 나와 그 옆에 있는 에무(emu)라는 묘한 이름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영화관, 공연장, 미술관, 북카페가 함께 있는 복합문화 공간이다. 골목길 끝자락에 있음에도 제법 손님이 있어 카페의 안내문을 살펴보니 흥미로운 문구가 보인다.

“이곳 카페 에무는 왕과 왕비가 사랑을 나눈 회상전의 옛터이다.”

에무북카페

회상전은 경희궁 왕비의 침전을 말하고 이곳에서 숙종과 경종이 태어났다고 한다.

발길을 돌려 경희궁1길을 따라 역사박물관 입구 쪽으로 내려오다보면 특이한 외경의 건물이 있어 보니 체코 대사관 건물이다. 세종로자치회관 옆이다.

옛 골목길의 매력은 두 가지, 획일화되지 않은 다양성과 느림의 미학이다. 경희궁1길과 그 옆의 경희궁길은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성곡미술관, ‘카페느티’ 등은 이전에 재벌 회장이나 부자들 집이 있던 곳이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생전에 자기 집이 이렇게 바뀔 줄 예상이나 했을까? 앞서 말한 도쿄의 골목길 산책자 나가이 가후의 글이 떠오른다.

“오늘 지나온 절 문이나 어제 쉬어갔던 길가의 거목도 다음번에 필시 주택이나 공장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면 그다지 유서 깊지 않은 건물이나 오래되지 않은 나무도 왠지 그윽하고 쓸쓸한 심정으로 올려다보게 된다.”

다시 박물관 입구 쪽으로 나왔다.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건너로 시네큐브가 보인다. 건물 앞에는 조너선 브로프스키의 작품 <해머링 맨>이 오늘도 열심히 망치질하고 있다. 그렇다. 긴 호흡으로 지금의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 단순히 견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저 망치질하는 사람처럼 맹렬히 단련하고 준비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또다시 따뜻한 계절이 찾아올 테니까.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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