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년 전 앙소문화에서 이어져온 바이주 현대화 기수

이인우의 중국 바이주 기행 ④ 허난성 싼먼샤시 멘츠현 앙소주

등록 : 2020-02-27 14:48 수정 : 2020-02-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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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주’ 자 기원된 뾰족 항아리 발견된 곳

천년 전 소동파가 즐긴 ‘예천춘’의 고향

1975년 국영주창 세워 새 바이주 개발

2011년 네 종류 향 겸비한 ‘도향’ 공인돼

새 술에 취해도 소동파 옛 시가 떠올라

중국 뤄양(낙양)에서 시안(서안)으로 가는 길목에 허난성 싼먼샤(三門峽·삼문협)시 멘츠(池·민지)현이 있다. 인구 36만의 작은 고을이지만 시안-뤄양-카이펑(開封·개봉)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예로부터 술 산업이 번창했다. 술맛도 좋아 이 지방의 술은 일찍이 ‘예천춘’(醴泉春)이라 불리며 명주 대접을 받아왔다. 그런 멘츠로 가는 차 속이니 마땅히 소동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도향(陶香)형 앙소주의 대표 브랜드 ‘채도방’. 사진 속의 몸통 술은 46도, 뚜껑 부분의 작은 통은 70도짜리다. 두 가지를 취향에 따라 섞어 마실 수 있게 만들었다. 다섯 명이 손잡고 춤추는 상표 도안은 양사오(앙소) 문화 유적지 출토 채색도기에 그려진 신석기시대 그림이다. 앙소주의 오랜 역사를 상징한다.


“인생이란 결국 무엇과 같은지 아는가/ 응당 눈 온 뒤 진흙탕을 걸어가는 기러기와 같겠지/ 진흙탕 위에 우연히 발자국을 남겼어도/ 날아가는 기러기가 어찌 동서를 헤아리겠는가…”(‘동생 자유(소철)의 멘츠 추억에 답하며’(和子由池懷舊) 1연)

오늘날 멘츠를 대표하는 예천춘은 소동파도 맛보지 못한 앙소주(仰韶酒)이다. 앙소주는 허난성 바이주 가운데 역사는 짧은 편이나 인지도는 높은 술이다. 1970년대 국영주창으로 건립될 때부터 서민 대중을 위한 바이주 생산에 주력해왔다. 물론 오랜 술 전통이 있는 지방이기 때문에 허난성 동부 상추(商丘·상구)시에서 생산되는 장궁(張弓)주와 함께 허난성 ‘지리표지산품’(정부 지정 지역특산품)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도향(陶香)이라는 새로운 향형을 내세워 ‘채도방’(彩陶坊) 등 고급주 브랜드를 시장에 내놓고 있다. 멘츠현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인 양사오(앙소) 문화 관광산업 활성화와 연계한 고급화 전략이다.

멘츠현에 자리잡은 하남앙소주업유한공사(이하 앙소주창) 정문을 통과하면 중국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색 깃발 석물과 함께 ‘예주진흥, 앙소일마당선’(豫酒振興, 仰韶一馬當先: 허난 주류산업 진흥, 양사오가 앞장선다)이란 글귀가 맨 먼저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 조형물들은 앙소주창이 중국공산당에 뿌리를 둔 사실상의 국영주창임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1950년대 민간 양조장으로 출발해 75년 국영주창이 됐고, 2004년 현재와 같은 민영 회사 형태를 갖췄다. 직원 2700여 명에 30여 종의 술을 연간 10만t 생산한다. 생산량만으로는 중국 전체로도 상위권에 속하는 대형 주창이다. 2015년 허난성 정부가 바이주 연구개발 인재 양성을 위한 박사후 연구기지를 앙소주창에 설치한 것은 이 회사의 성격과 위상을 잘 말해준다.

‘현대 중국 술의 아버지’ 식품공학자 친한장(1908~2019).

바이주로서 앙소주의 가장 큰 차별성은 일반적인 향형 분류를 거부하고 도향(陶香)이라는 독자적인 향형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본래 앙소주는 농향형 바이주를 주로 생산했으나 2008년 도향형을 개발했다. 회사 내 앙소주문화박물관에는 중국 바이주의 태두, 현대 중국 술의 아버지 등으로 불리는 식품공학자 친한장(秦含章·1908~2019)의 흉상을 진열해 놓고 있다. 대단히 장수한 사람으로도 유명한 친한장은 여러 차례 앙소주창에 초빙돼 앙소주 연구진을 지도했는데, 그 결실이 도향형의 개발이라는 논리다.

앙소주창이 말하는 도향형 바이주는 “농향, 청향, 장향과 참깨향(지마향) 등 네 종류의 향형을 겸비한” 바이주를 말한다. “깊고 우아한 장향과 짙고 강한 농향에 가늘고 매끄러운 참깨향과 맑고 부드러운 청향을 얹고 있다. 여기에 원료 자체의 곡물향과 누룩향이 가미돼 여러 향이 자연스럽게 혼연일체를 이룬다. 향기는 그윽하게 진하고 은은히 맑다. 입에 들어가면 녹듯이 부드럽다. 마신 뒤 입안에 남는 참깨향이 유장하다.”

원료로 9가지 곡물을 쓰는 것도 남다르다. 수수, 밀, 보리, 완두, 쌀 등 일반적인 바이주 원료에 옥수수, 찹쌀, 좁쌀, 메밀을 더 투입한다. 혼합 원료가 많다보니 양조기술도 까다롭다. 요약하면, 향형별로 술지게미를 따로 걸러서 비법에 따라 배합한다. 누룩은 밀기울 누룩을 비롯해 네 종류를 혼합해 쓴다. 세 번째 특징으로는 술 발효에서 증류, 저장, 상품 용기까지 모두 도기의 특성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완성해 출시한 것이 앙소주의 대표 브랜드인 ‘채도방’이다. 앙소주창의 도향형 바이주는 2011년 중국 바이주 전문가 감정을 통과함으로써 “중국 바이주의 역대 13번째 향형”을 공식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앙소주창에서는 방문객이 각자 취향에 따라 원주를 브랜딩 해서 다양한 맛을 만들어보도록 하는데 바이주 애호가들에겐 특별한 체험이 될 만했다. 친절하게 좋은 술을 감별하는 팁도 준다. 첫째, 관기형(觀其形). 잔에 따를 때 가벼운 광채가 나고 술을 흔들어 부유물이나 침전물이 없어야 한다. 둘째, 변기색(辨其色). 정면 또는 옆에서 볼 때 무색투명하거나 아주 엷은 황색을 띠어야 한다. 셋째, 촉기윤(觸其潤). 술을 손가락으로 만져볼 때 터치감이 비단을 만지듯 반들반들 매끄럽다. 넷째, 문기향(聞其香). 술을 3분의 2 정도 따른 뒤 1~3㎝ 떨어져서 코로 숨을 들이쉬어 냄새를 맡기만 하고 내쉬지 않는다. 이때 좋은 술은 들이마실 때 느껴지는 향의 양이 고르고 부드럽고 맑은 주향이 코끝에 감돈다. 다섯째, 품기미(品其味). 술을 0.5~2㎖ 정도 입에 넣고 혓바닥으로 맛을 본다. 좋은 술은 입안에 향미가 골고루 흩어지고 상쾌하게 미끄러지듯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끝으로 향기운(享其韻). 술이 목구멍을 넘어간 뒤 입을 열어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닫고 숨을 내쉬며 풍미의 여운을 느껴본다.

앙소주창이 도향형을 개발하고 중국 정부가 이를 공인한 배경에는 중국의 고대문명을 선전하고 관광 상품화하려는 정부 차원의 전략이 작용한다고 생각된다. 멘츠현 양사오촌은 세계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인류 최초의 채색도기가 발굴된 곳으로 유명하다. 1921년 스웨덴 고고학자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이 발굴한 6천~7천 년 전의 인류 거주 지역인 양사오 문화는 룽산(용산) 문화와 함께 고대 황하문명의 발원지로 꼽힌다. 특히 술을 만들거나 마시는 데 사용한 주구(酒具)가 대량으로 출토돼 멘츠 지역의 술 역사가 대단히 오래됐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했다. 발굴된 주구 가운데 주둥이가 작고 몸통이 길며 바닥이 뾰족한 항아리는 술 주(酒) 자의 기원이 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하다’라는 도취(陶醉)라는 단어에 질그릇 도 자가 쓰인 것도 그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멘츠현 양사오(앙소)촌 유적지에서 출토된 토기. 주둥이가 작고 긴 몸통에 바닥이 뾰족한 형태로 보아 술을 발효 또는 저장한 기구로 여겨진다. 학자들은 한자의 술 주(酒) 자가 이런 종류의 항아리를 상형해 만들 어진 것으로 본다. 앙소문화박물관 소장.

이런 고대 역사는 멘츠현의 대표적인 술 이름이 왜 앙소이며, 굳이 새 향형을 개발해 도향이라 이름 붙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게 해준다.

앙소주의 대표 브랜드 채도방의 상표 도안은 다섯 명이 손잡고 춤추는 모습이다. 발굴된 채색 질그릇 안쪽에 그려진 신석기시대 그림으로, 중국의 국보 중의 국보이다. 이 역시 앙소주의 연원을 7천 년 전 고대 중국 문명의 발원에 연결해 술의 콘텐츠를 풍부하게 하려는 마케팅 일환이다.

‘맹꽁이가 사는 연못’이라는 뜻의 멘츠라는 이름은 이 지역이 고대로부터 물이 좋은 곳이었음을 전해준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인상여·염파전’에는 전국시대 진나라 왕과 조나라 왕이 멘츠에서 만나 술을 마시며 회담한 이야기가 나온다. 청나라 때 쓰인 <멘츠현지>에는 “성 동쪽에 옥황상제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의 물로 술을 담그면 술맛이 뛰어나 우물 이름을 예천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명청시대에는 교통의 요지답게 큰 술집이 100여 가에 이르니 “술로 가득한 연못은 가히 배를 저을 만하고, 일시에 술을 들이켜는 사람이 삼천 명이다”라는 중국인다운 과장을 후세에 남겼다. 기사 서두에 인용한 소동파의 시는 동생 소철이 멘츠를 회상하며 쓴 시에 화답한 것이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함께 멘츠를 여행했다. 물론 예천춘도 원 없이 즐겼으리라. 오늘은 멀리 바다 건너 동쪽에서 이방의 나그네들이 찾아와 멘츠의 예천을 찬양하고 있으니 몇 천 년의 시간도 잠깐 같다. 앙소주창을 떠나며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멘츠의 풍경을 바라보니 소동파 형제의 시에 등장하는 절방 벽에 쓰였다던 천 년 전 시가 궁금해진다.

“노승은 이미 죽고 새 탑이 세워졌는데/ 허물어진 승방 벽에 썼던 시는 찾을 길 없다/ 지난날의 고달픈 길 아직도 기억하는가/ 먼 여정, 지친 사람, 울어 예는 당나귀를.”(‘동생 자유의 멘츠 추억에 답하며’ 2연)

중국 허난성 멘츠현/글·사진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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