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기의 서울 골목길 탐방

길 잃은 창작촌 골목…예술은 떠나고 카페만 북적

영등포구 문래동 문래예술창작촌 골목

등록 : 2016-06-02 16:31 수정 : 2016-06-03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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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구 문래동 문래예술창작촌 골목 들머리. 사진 촬영에 주의를 부탁한다는 문구가 먼저 손님을 맞는다. ‘일하고 있습니다. 초상권을 지켜 주세요’ ‘작업중 내부 촬영을 자제해 주세요’ ‘초상권을 존중하는 촬영 문화를 만들어 주세요’ ‘철공소’ 마을이 ‘예술창작촌’으로 알려지고 나서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얼마 전 서울의 어느 마을에 주민이 벽화(공공미술)를 지운 일이 있었는데 바로 그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골목 안으로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할아버지(80, 김씨) 한 분이 “어디서 나오셨오? 사진은 뭣하러 찍으요?”라며 조금은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잠시 머뭇거리자 “이리 들어오시오. 이리 들어와서 이야기해 보시오.”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다. 할아버지는 열댓 평쯤 되어 보이는 선반공장을 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기계들과 각종

격자형으로 조성된 주택지는 1960년대부터 공장 지대가 되었고, 이 공장들은 제각기 철강산업 생태계를 이루어 못 만들 것이 없는 생산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재개발이 논의되고 있는 이곳은 철공업을 재생시키려는 어떤 정 책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연장들이 가득하지만 작업을 하던 중은 아니다. 그는 내 대답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아시오? 예술창작촌이 뭐하는 곳이오?” 하고 오히려 나에게 묻는다. 그러면서 여기서 무슨 예술을 창작하느냐? 이제는 커피숍만 많이 들어왔다고 탄식한다.

문래동이 예술창작촌이 되기 전, 이른바 문래동 철공소 마을은 언제 생겨났을까? 골목에 들어서니 아직도 매캐한 냄새와 탁한 공기가 이곳이 공장 지대임을 실감케 하지만 이들 공장들이 언제 생겨났고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말하는 사람은 없다.

문래동의 역사를 증명하는 ‘영단수퍼’

1941년 일제는 조선영단주택을 설립했다. 지금의 토지주택공사처럼 주택을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했던 일제강점기 때 기관이다. 이는 그보다 몇 년 전 소위 ‘조선시가지계획령’을 발표(1934년 6월20일)하고 이어서 ‘경성부내 토지구획정리사업’(1937년 2월2일)을 한 조선총독부의 경성부(서울)의 확대 정책 연장선에 있었다. 조선영단주택은 문래동(옛 도림정)을 비롯해 상도동(상도정), 대방동(번대방정)에서 동시에 집을 짓기 시작한다.


최초의 대형주택단지 건설을 목표로 진행된 주택 사업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3년 전(1942년 8월)에 입주를 시작했지만 계획의 3분의 1도 실천하지 못하고 중지됐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재정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문래동 철공소 단지는 차량이 왕복할 수 있는 길과 그보다 좁은 골목길, 아주 좁은 샛골목으로 가로세로 구획지어 획일적인 주택단지로 만들었다. 계획 단지였다는 증거다. 이런저런 잡화를 파는 작은 가게의 이름이 ‘영단수퍼’인 것도 문래동이 영단주택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계획 단계에서는 군데군데 유휴지를 두었다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고 급하게 마무리한 흔적만 여기저기 보인다.

열일곱에 철공소 직공으로 시작해 80살이 될 때까지 철공 일로 살아온 김씨 할아버지. 문래예술창작촌으로 이름이 바뀌고 카페가 늘면서 높아지는 작은 공장의 임대료를 걱정하며 기계를 손보고 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철공 일을 해왔다는 김씨 할아버지는 “여기가 삼성이나 현대보다 더 커!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알아? 사흘만 주면 비행기가 날아가요!”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무슨 얘기인가? 문래동 철공소 단지가 산업생태계를 갖춘 곳이어서, 어떤 주문이든 단시간 내에 생산해낼 수 있는 산업 기지였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영단주택지에 들어선 공장들의 진열대는 문래예술창작촌의 예술을 무색케 한다. 이미 그 자체로 예술이 아니냐는 반론이 나온다.
철강산업의 네트워크, 문래동 철공소 단지

실제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문래동에는 방직공장을 비롯해 큰 공장들이 들어섰다. 해방 후에 정부가 영단주택들을 팔아버리자(1959) 인근에 구로공단이 들어서면서 1960년대부터 작은 공장들도 문래동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문래동 군수송본부가 철강산업단지가 되었고, 문래동은 철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을지로와 원효로에서 시작된 소규모 철공업이 국가 전체의 산업구조 변화와 발전에 맞물려 문래동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추억일 뿐이다.

5월에만 문래동에는 카페 두 곳이 개업을 했다. 돈 없는 젊은 예술가들이 열악한 철공소 건물 2층에 들어가 창발적인 예술 활동을 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곳이 문래동이었다. 이제는 예술 아닌, 혹은 예술 대신 커피숍과 음식점으로 창업을 하고 있다. 공장 지대의 우중충하고 건조한 분위기가 조금씩 색깔이 입혀지고 향긋한 커피 냄새와 입맛 돋우는 고기 굽는 냄새로 덮이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문래동 예술창작촌 골목에는 카페들이 잇따라 문을 열고 있다. 예술 대신 커피숍이 바톤 터치하는 분위기이다.

김씨 할아버지의 선반공장 건너편에 자리 잡은 젊은 사장 겸 직공(48, 서씨)이 합류하자 할아버지는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어디에 탄원서라도 내야겠다는 것이다. 예술이 아닌 커피숍이 들어오면서 임대료가 두 배로 올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으니 나라가 무슨 조처를 해서 국가산업 네트워크를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하소연이다.

글·사진 김란기 ‘살맛나는 골목세상’ 탐사단 운영, 문화유산연대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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