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고급 국수의 대중화 이끈 안동국시 선구자

안동국시 소호정 since1985

등록 : 2018-05-2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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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임원택 교수 은퇴 앞두고

부인 김남숙, 호구지책으로 문 열어

안동 명문가 출신인 김씨 손맛

80년대 강남 개발 붐 타고 대중화

압구정서 개업 반년도 못 돼 문전성시

고급 국수를 대중화한 공로

김영삼 전 대통령도 열혈 팬

임동열, 아들·사위에 가업 훈련


창업 초기 압구정동 안동국시 가게 앞에 선 고 김남숙, 드물게 남아 있는 오래된 사진 한장을 그림으로 옮겼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국수는 긴 면발로 인해 장수를 기원하는 상서로운 음식이다. 옛날 사람들은 그런 국수를 귀하게 여겨 만들기도 잘했던 것 같다. 12세기 초 고려를 다녀간 서긍이라는 중국 사람은 “개경의 맛있는 음식 10여 가지 중에서도 국수가 으뜸이었다”(<고려도경>)는 맛 체험기를 남기고 있다.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제례에 면(麵)을 쓰고, 절에서 국수를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주자학이 전래한 14세기 이후 국수는 제례상에 올라가는 음식으로 격상됐고, 절에서는 육식을 대신하는 고급 음식으로 상품화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잔치국수’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밀 생산이 적은 우리나라에서 보통 사람들은 혼례나 축수연 같은 큰 잔치나 제사 때가 아니면 국수를 쉽게 맛보기 어려웠다. 국수가 보통 음식이 된 것은 6·25 이후 구호물자로 밀가루가 대량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국수는 평양냉면, 춘천막국수처럼 지방의 특색에 따라 진화하기도 했다. 안동을 비롯한 경상북도 내륙 지방은 수백 년 동안 조선 유교의 거점으로 다양한 제례 음식을 발전시킨 곳이다. 그중에서도 국수는 제사에 참석하는 문중 어른과 귀빈을 대접하기 위한 고급 접대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콩가루를 섞어 고소하고 찰진 맛을 더한 반죽을 채를 썰듯 가늘게 썰어 쇠고기 고명을 얹고 그 국물에 말았으니 먹거리가 귀한 시절에 얼마나 고급스러운 음식이었을까 싶다. 보통 사람들은 맹물이나 장국에 말고 조금 더 신경을 쓰면 닭고기 국물이었다. 낙동강 발원지답게 은어가 제철인 때는 수박 향의 은어를 고아 밑국물로 썼다고 하니 풍미 또한 남달랐을 것이다.

 

#안동 양반가의 귀빈 접대 음식이 대중적인 메뉴로 정착한 것이 ‘안동국시’다. 안동이라는 지역 이름과 국수의 경상도 사투리 ‘국시’를 합쳐 서울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그래서 ‘안동에는 안동국시가 없다’는 말도 생겼지만 안동 밖으로 나온 안동국시는 대중화가 이뤄지면서 전주의 비빔밥, 평양의 냉면처럼 한 지역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한식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서울에서 경상도 양반 국수를 대중화한 사람은 안동 출신의 여성 김남숙(1928~ 2008)이다. 1985년 김남숙은 강남 개발로 빠르게 부촌이 된 압구정동에 10평 남짓한 작은 국숫집을 차리고 ‘고유의 맛안동국시’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김남숙과 아들 임동열은 옥호를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던 끝에 자기들이 만드는 국수가 안동 양반들이 먹던 ‘국시’임을 새삼 떠올리고 안동국시라는 평범한(?) 이름을 생각해냈다. 이 작명은 대단한 성공을 불러왔다.

안동국시가 우리 음식사와 풍속사에 새긴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소수의 사람만 먹을 수 있었던 고급 국수를 보통 사람들도 즐겨 먹을 수 있는 메뉴로 보급한 점이 가장 큰 공로다. 두 번째는 일반적으로 맛이 없다는 통설을 깨고 경상도 음식을 지역을 초월해 사랑받는 음식으로 전국화한 점이 아닐까 싶다. 안동 양반들의 국수가 서울에 올라와 안동국시란 일품요리가 된 지가 30여 년밖에 되지 않지만, 오늘날 안동국시를 간판으로 건 국숫집이 서울과 대구뿐 아니라 전국 대부분 도시에 들어서 있다. 그 시발이 된 김남숙의 안동국시집이 서초구 양재동에 본점을 둔 ‘안동국시 소호정’이다. ‘호걸들의 웃음이 넘치는 집’이란 뜻의 소호정(笑豪亭)은 1995년 압구정동에서 현재 자리로 옮겨와 10여 개 이상의 분점을 거느린 대형 음식점으로 3대를 이어가고 있다.

 

#경북여고·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당시 서울대 교수 부인이었던 김남숙이 국숫집을 시작한 것은 “돈하곤 담을 쌓은 남편 덕분”이었다고 한다. 김남숙의 남편은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있던 경제학자 임원택(1922~2006). 뒷날 <제2자본론>이란 저술로 학술원상을 받았던 저명한 경제이론가이지만 정작 자신은 “경제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6남매를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내면서 살림이 쪼그라들어 삼선동으로 명륜동으로 전셋집을 전전하게 된 김남숙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음식 장사로 돈을 좀 벌어보기로 한다. 남편에게는 ‘절대 비밀’로 부친 채였다. 대구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자란 김남숙은 어려서부터 다양한 고급 음식을 섭렵해 미각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당연히 음식 솜씨도 격이 높았다.

칼국수에 배추김치와 함께 부추김치, 깻잎무침을 곁들인 상차림도 김남숙의 안동국시집이 처음 정형화한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 김남숙을 도와 함께 가게를 열었던 큰아들 임동열(68·소호정 회장)의 회고. “어머니가 처음 문을 연 날 국수 한 그릇 끓이는 데 30분 이상이 걸렸다. 긴장한 탓에 집에서 가져온 풍로의 불 조절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딱 1명 끈기 있게 기다려준 중년의 손님(나중에 알고 보니 부장판사였다고 한다)은 어머니가 간신히 내놓은 국수를 한 젓가락, 한 젓가락 음미하듯 천천히 먹고 나더니 물었다. “할머니, 본래 안동분인가요? 도대체 이렇게 맛있는 국수는 어떻게 만드나요?” 다음날 그는 친구 넷과 다시 왔고, 그다음부터 그 네 명의 친구들이 각자의 친구를 데려오고. 그렇게 해서 불과 한 달여 만에 손님이 넘쳐났고, 반년도 안 되어서는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정·재계 인사, 장관, 군 장성, 유명 연예인들이 줄줄이 가게에 들어섰다.”

사실 안동이란 지역 이름과 국수의 경상도 사투리가 합쳐진 안동국시가 탄생한 시간과 공간이 1980년대 서울의 강남이라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강남은 1970년대 이후 서울에 등장한 신흥 부촌의 대명사. 1980년대는 3저 호황을 업고 중산층을 중심으로 외식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한 때. 그리고 티케이(T.K. 대구·경북)란 조어가 상징하듯이 당시는 경상도 전성시대. 강남이란 부유층 거주지에 사는 성공한 경상도 출신의 향수를 자극하고, 새롭게 편입된 권력층과 신흥 부자들에게 ‘구별짓기’를 부추기던 시대적 배경이 안동국시의 대성공을 추동한 게 아닐까?

안동국시집에서는 문어숙회, 수육, 전, 묵 등 경상도식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제대로 레시피를 갖춘 안동국시는 큰 양반가가 아니면 쉽게 먹을 수 없었던 음식.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양반의 뿌리(?)를 확인하거나, 혹은 그런 출신임을 과장 또는 내면화하는 행위로 이 국수의 맛을 함께 즐기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5년 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자 목포 홍어가 뜬 사실을 기억하면 그리 억지스러운 추론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안동국시 탄생의 시대적 필연을 입증할 과학적 이론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당시 제 코가 석 자였던 김남숙이 이런 것을 따져서 안동국시집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남숙의 가장 자랑스러운 단골은 고 김영삼 대통령이다. “1989년 말 어느 날, 제이피(김종필)와 와이에스(김영삼)가 나란히 들어와요. 제이피 쪽에서 와이에스를 초청했대요.” 이후 두 사람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3당 합당을 했고, 국수 마니아 김영삼은 김남숙표 국수의 열혈팬이 된다. 안동국시 신화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단골손님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청와대에서 열린 문민정부 첫 국무회의(1993년 2월27일) 후 대통령과 장관들의 점심으로 직접 안동국시를 끓여준 일이다. 칼국수라는 서민 메뉴를 통해 부패로 점철된 전 정권과 자신을 차별화하고자 한 문민정부의 정치적 퍼포먼스로 기획된 것이었지만, 김남숙의 안동국시에는 ‘청와대 칼국수’라는 “영예로운” 별칭을 안겨준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도 종종 소호정을 찾아 안동국시를 즐겼다. 1995년 10월3일 개천절날 소호정을 찾은 김 대통령이 방명록에 ‘大道無門’ 휘호를 남기고 있다. 오른쪽 여성이 고 김남숙.

이처럼 명성을 얻으며 번창한 김남숙의 안동국시집은 1995년 지금의 양재동 자리에 새 본점 건물을 짓고 ‘안동국시 소호정’이라는 간판을 단다. 안동국시를 작명한 사람으로서 그냥 안동국시로 상호등록을 하고 싶었으나 이미 보통명사가 되다시피 한 이름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도 종종 가게를 찾아와 국수를 즐겼다. 그가 소호정 신축을 축하하며 방명록에 남긴 한자 휘호 ‘大道無門’(대도무문) 네 글자는 소호정 가족이 자랑스레 간직하고 있는 기념물이다.

김남숙의 큰아들 임동열 소호정 회장과 사위 김우경씨. 임 회장은 수년 전부터 아들과 사위에게 가업 승계 수업을 하고 있다.
 

몇 년간 암 투병을 하며 소호정의 미래를 많이 생각했다는 임동열은 아들과 사위 모두 다니던 회사를 접게 하고 가업 승계 훈련을 시키고 있다. 아들은 이미 하남의 한 백화점에 차린 가게를 맡아 경영수업을 하고 있고, 자신을 많이 닮았다는 사위는 본점 주방에서 일을 배우게 했다. 그는 일찍부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일본의 유명 제면회사를 찾아다니며 국수 공부를 시켰다. “음식점 주인이 주방일을 모르고선 아무리 성공해도 오래 지킬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임동열 자신도 음식 조리 과정과 맛에 관한 한 소호정 최고의 전문가를 자부한다. 손으로 면을 뽑는 과정을 기계화한 일본 우동기계를 우리 칼국수 조건에 맞게 개량해내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형제, 친구 등 지인을 중심으로 내준 분점들을 장차 모두 분리 독립시키고, 자신과 자녀들은 본점을 중심으로 1~2개의 소호정에만 집중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 홍두깨, 냄비 등 어머니의 유품과 각종 기념물을 모아 박물관을 꾸미고 싶은 마음도 있다.

“몸이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안동국시라는 음식을 만들고 소호정을 키워온 우리 집의 역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소호정을 잘 가꾸어 일본의 노포들처럼 몇백 년, 몇십 대로 이어가고 싶다. 손자·증손자들이 음악가든 학자든 하고 싶은 일을 하되, 나이 50 이후에는 언제든 가게로 돌아와 가업을 지키는 걸 당연하게 여기도록 가르칠 것이다.”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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