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고무줄놀이하면서도 불렀던 노래 ‘서울의 찬가’

노래비 속 서울 노래들 (상)

등록 : 2018-03-2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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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재 노래비 9개

1호 ‘서울의 찬가’는 대표곡

서민 애환 그린 ‘마포종점’

애절한 사연 담긴 ‘단장의…’

사진 위 왼쪽부터 ‘마포종점’ ‘단장의 미아리고개’, 중앙 국내 대중가요 1호 노래비 ‘목포의 눈물’, 아래 왼쪽부터 ‘애수의 소야곡’ ‘서울의 찬가’ 노래비. 일러스트 최보경

2000년대 들어 전국 각지에는 지역축제와 더불어 지명이 들어간 대중가요 노래비 건립이 이어지고 있다. 1968년 국내 최초로 탄생한 윤석중의 동요 ‘반달’ 노래비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창경궁에 세웠다가 1984년 광진구 구의동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전했다. 같은 해에 대중가요로는 전남 목포시 유달산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최초로 건립되었다. 이후 이난영을 추모하는 난영가요제가 열렸으니 노래비 건립과 지역축제의 역사는 꽤나 오래된 셈이다. 서울에는 총 9개의 대중가요 노래비가 있다. 건립 순서에 따라 소개하겠다.

서울 노래비 1호-패티김 ‘서울의 찬가’


서울 대중가요 노래비 1호는 1994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된 작곡가 길옥윤(노래 패티김)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서울의 찬가’ 노래비다. 1995년 10월25일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 세운 이 노래비는 조각가 황현수가 대리석으로 만든 피아노 모양의 받침대 위에 가사와 악보를 새겨놓고 그 위에 청동으로 만든 서울시 시조 까치가 시목인 은행나무 열매를 물고 앉은 모습이었다. 현재는 원형이 훼손되어 악보가 새겨진 돌과 청동으로 제작된 까치가 망실되어 가사가 새겨진 앞판만 남은 상태다.

길옥윤은 생전에 ‘서울의 찬가’에 대해 ‘세계 유명 도시는 그 도시를 찬미하는 노래가 모두 있는데 왜 서울은 없는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만든 노래’라고 밝혔다. 아마도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을 찬미한 노래가 무수하게 발표되었던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1969년 패티김이 동아방송의 ‘이달의 노래’ 코너에서 처음 발표한 ‘서울의 찬가’는 서울 각 지역의 동네 골목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을 정도로 사랑받았다. 또한 당시에 각 학교에서는 수업종이 울리면 ‘종이 울리네 수업이 시작되었네…’로 가사를 바꾼 노래가 등장했을 정도로 서울을 대표하는 노래로 크게 유행했다.

서울 노래비 2호-이해연 ‘단장의 미아리 고개’

서울 노래비 2호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비다. 이 노래비는 1996년 8월1일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 정상에 자리한 아리랑 아트홀(현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에 건립되었다. 상당한 크기의 철제에 노래 제목과 가사를 새겨넣은 독특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 고개를 넘어 미아리 일대에 조성되었던 조선인 공동묘지에 묻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기에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됐다고 한다. 6·25전쟁 때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던 이 고개는 가사에 묘사된 것처럼 인민군이 후퇴할 때 수많은 사람이 철삿줄에 두 손을 묶여 납치되어 넘어갔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휴전 후인 1956년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로 발표되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작사가 반야월의 실제 경험이 녹아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반야월은 가족을 남겨두고 처가가 있는 김천으로 내려가 아내와 아이들은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던 그는 서울이 수복되면서 아내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네 살배기 어린 딸 수라는 김천으로 피난을 가려고 미아리고개를 넘던 중에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어 오열했다. 숨진 아이를 미아리고개에 손으로 흙을 파고 묻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찾아갔지만 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당시의 비통한 심정을 애절한 가사로 옮긴 노래가 바로 ‘단장의 미아리고개’이다.

서울 노래비 3호-은방울 자매 ‘마포종점’

서울 노래비 3호는 1997년 12월 마포대교 옆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어린이공원에 세운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노래비다. 박춘석이 작곡하고 정두수가 작사한 ‘마포종점’ 노래비는 바위에 가사가 쓰인 상판을 붙여놓은 평범한 모습이다. 마포 전차 정류장과 노래에 얽힌 유래와 제작일자를 바위 3개로 구성한 점이 특색이다. ‘마포종점’은 1960년대에 서울 시가지를 누볐던 전차의 종점인 변두리 마포의 쓸쓸한 밤 풍경과 강 건너 영등포로 일하러 떠난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68년은 서울의 전차 운행이 중단된 해이기도 하다.

전차만이 아니다. 2절 가사에 등장하는 여의도는 비행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의도 비행장은 1916년부터 서울 여의도에 있던 국내 최초의 공항이다. 이후 1958년 김포공항으로 민간항공이 이전하면서 이곳은 미군전용 비행장으로만 사용되다 1971년 경기도 성남의 서울공항으로 비행장을 이전하면서 사라졌다. 또한 함께 등장하는 강변북로에 있는 당인리 발전소는 1930년 문을 열어 열병합발전소로 80년이 넘도록 서울을 밝히고 데웠다. ‘마포종점’은 1960년대 성장일로의 밝은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던 서울 도심에서 소외된 변두리 서민들의 슬프고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준 위로의 노래였다는 점에서 빛을 발한다.

서울 노래비 4호-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서울 노래비 4호는 옛 드림랜드였고 지금은 북서울꿈의숲이 된 공원에 세운, 일제강점기에 ‘서정가요의 제왕’으로 불렸던 남인수의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사랑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절절하게 표현해 많은 이의 가슴을 움직였다. 가사에 등장하는 ‘휘파람 소리’와 ‘바람 소리’는 대중가요 가사의 문학성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큰 규모의 이 노래비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했던 당대 가요계의 유명인사 이름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는 남인수의 고향인 경남 진주시에도 있다. 사실 이 노래비는 서울 노래비 1호인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보다 7년 앞선 1988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세워졌다. 시기로는 가장 앞서지만 4호 서울 노래비가 된 것은, 1998년 드림랜드에서 열렸던 남인수가요제 때 노래비를 지방에서 서울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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