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종점마을을 가다

‘섬’으로 남아 서울에 숨을 불어넣는 마을

강동구 가래여울마을

등록 : 2017-01-05 14:11 수정 : 2017-01-10 11:36

크게 작게

‘가래여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순해진다. 마을버스 종점 마을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가래’란 가래나무가 많아서 붙은 단어이고, ‘여울’이란 말 그대로 강물에 산소를 공급해서 생명들을 더 건강하게 살게 하는 그 여울이다. 종점 마을 ‘가래여울’은 굳어가는 서울에 숨을 불어넣는 여울이다.

마음을 위로하는 마을 이름 ‘가래여울’

가래여울마을로 가기 위해 지하철 5호선 상일동역에서 내렸다. 가래여울마을과 암사동 서원 마을을 오가는 강동02번 마을버스를 탔다. 가래여울마을은 강동02번 마을버스 종점이다. 뿌리에서 길어올린 수액의 마지막 한 방울이 우듬지 잎사귀 하나까지 생명의 기운을 실어나르듯, 강동02번 마을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가래여울마을로 향한다.

버스는 강일리버파크 아파트 단지를 지난다. 시멘트 시대의 공고함이 수직의 권위와 어울린 경직된 풍경을 벗어나자 넓은 땅 위에 펼쳐진 비닐하우스 단지가 나온다. 흙에서 자라나는 생명이 수평의 안식 위에서 편안해 보인다.

올림픽대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가래여울마을이다. 굴다리는 마을의 안과 밖을 나누는 상징 같다. 굴다리를 지나면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나올 것 같았다. 굴다리를 지난 마을버스는 곧 종점에 도착했다. 낭창거리는 수양버들 가지 아래 지붕 낮은 집이 꾸밈없다. 세월의 더께가 오히려 빛나고 있었다.

마을버스가 닿은 종점 마을 이름이 ‘가래여울’인 건 정말 다행이다. ‘가래여울’, 마을 이름을 부를 때도 들을 때도 마음이 순해진다. 마을버스 종점 앞, 수양버들이 있는 오래된 집은 마을에 있는 가게. 가게 주인아저씨는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뿌리내리고 사는 남평 문씨 후손이라고 했다. 그에게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래여울마을은 서울 동쪽 끝 강동대교 남단, 올림픽대로와 한강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인근의 능골, 강매터, 벌말, 말우물 등의 자연마을과 함께 강일동을 이루고 있었다.


송파장 가는 길목을 지키던 남성 문씨 집성촌

능골은 청송 심씨 집성촌으로 50여 가구가 있었는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마을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강매터는 광주 이씨 집성촌이었는데 이곳 또한 개발로 옛 모습이 사라졌다. 가래여울마을은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 옛날에는 남평 문씨가 30여 가구 정도 됐는데 지금은 다섯 가구만 남았다. 지금은 외지에서 들어온 다른 성씨의 사람들이 많지만, 앞뒷집 옆집이 서로 다 잘 알고 정을 나누고 살던 옛 마을 분위기가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다.

가래여울마을은 가래와 여울을 하나로 발음하면서 연음화된 ‘가려울’로도 불렸다. 조선 시대 광해군 때 광주목사를 지냈고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이 지금의 가래여울마을에 살면서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를 추탄(楸가래나무 추, 灘여울 탄)이라고 짓기도 했다.

강가와 마을 곳곳에 있었다던 가래나무는 대부분 없어졌다. 마을에 띄엄띄엄 남아 있는 가래나무가 마을 이름의 맥을 잇고 있다. 가게 아저씨가 눈을 감고 옛 생각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잇는다.

마을 앞 강에 있던 여울도 없어졌다. 현재 강동대교가 놓인 곳에 예전에 여울이 있었다. 강동대교 남단이 가래여울마을이고 북단이 경기도 구리시 관할인 돌섬이었다. 가래여울마을 사람들은 걸어서 여울을 건너 돌섬을 오가곤 했다. 올림픽대로를 만들면서 강가에 있던 집들은 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한강에 여울을 만들던 흙과 모래도 올림픽대로를 만들면서 자재로 사라졌다. 마을의 생김새는 그렇게 바뀌었다. 올림픽대로가 생기기 전에 가래여울마을의 백사장은 뚝섬유원지, 광나루유원지와 함께 서울 동쪽의 3대 유원지였다. 하얀 모래밭이 강을 따라 미사리까지 이어졌다. 반짝이는 백사장 물놀이와 함께 돈을 내고 노 젓는 나무배를 빌려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가 언덕에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 배를 띄우고 배 위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지금도 가래여울마을에서 매운탕집을 하는 사람도 있다.

마을 부근에 나루터도 있었다. 덕소, 금곡, 광주 등에서 우시장이 서는 날이면 소를 사서 배에 싣고 나루터에 내려서 소를 끌고 마을을 지나 송파까지 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수양버들이 있는 가게 뒷길이 장을 보러 오가는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어서 ‘장길’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들이 쉬어 가는 주막이 있었는데, 지금 식당을 하는 감나무집 부근이다.

기와지붕에서 세월의 더께가 빛난다

마을에서 논농사와 함께 참외·고구마 농사도 지었다. 수확한 농산물은 배를 이용해 광진교까지 옮긴 뒤 손수레로 천호동까지 가 내다팔기도 했다. 모두가 추억으로 옮겨간 옛 이야기다.

지금 마을은 앞을 아파트 단지가 둘러싸고 있으며 뒤에는 한강이 있어, 가래여울마을은 섬 아닌 섬이 되었다. 그 골목 모퉁이, 그 집 담벼락, 그 집 기와지붕에 내려앉은 세월의 더께가 오히려 빛나는 것은 편리와 속도가 선의 잣대가 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을 품은 마을, 마을이 품은 사람의 이야기가 현재에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9면에 연재해온 ‘장태동의 서울 문학기행’은 지난달 23일 마감하고, 새해부터 ‘장태동의 종점마을을 가다’를 같은 면에 격주로 싣습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