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로 상처받은 아이 ‘호오’ 불어주는 ‘호야토토’
서울시 ‘디자인 거버넌스’에 시민 제안 1년 만에 송파경찰서에 전용 공간 생겨
등록 : 2019-01-11 11:24
미술치료사 오희정씨 아이디어에
시민 12명 5개월 동안 디자인 개발
학대예방경찰관, 피해 아동 만날 때
애착인형·놀이 키트 등 선물해
미술치료사 오희정(44)씨는 2017년 말 6개월째 상담하던 초등학교 2학년 남학생의 엄마에게서 한밤중에 전화를 받았다. 남편의 아동학대를 신고하러 경찰에 왔는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성향이 있는 아이를 혼자 감당할 수 없어 도와달라 했다.
경찰지구대 의자에 홀로 앉아 있던 아이는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 눈빛은 흔들렸고 의자를 발로 계속 찼다. 갑자기 일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경찰과 상담하는 엄마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저는 사건의 피해자인 아이가 불안해서 그렇게 한다는 게 보였지만, 남이 볼 때는 부산하고 뻔뻔해 보였겠죠. 경찰서까지 와서 얌전히 있지 못하고 철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때 ‘아이를 만나는 것에 미숙한 누구라도 아이와 함께 미술 놀이를 할 수 있는 상자가 있다면 아이가 심리적으로 훨씬 힘이 덜 들 텐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 경험을 소셜미디어에 올리자 서울시의 ‘디자인 거버넌스’ 사업에 제안해보라는 댓글이 달렸다. 디자인 거버넌스는 서울시에 아이디어를 내면 시민이 투표해 선정한 뒤 시민, 전문가, 디자이너, 기업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해 디자인으로 해결하는 사업이다. 사업을 제안한 지 1년이 지난 2일 오후 오씨는 서울시 관계자들과 함께 송파경찰서를 찾았다. 여성청소년과 사무실 한쪽에 있는 문을 열자 작고 아담한 공간이 나타났다. 파스텔톤 색감의 벽에는 귀여운 만화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차갑고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경찰서에 이런 공간이 생기다니!”라며 다들 감격했다. 오씨는 가져온 인형과 쿠션, 놀이 키트 등을 작은 의자와 책상 위에 놓으며 “어떡해! 너무 귀여워!”를 연발했다. “드디어 호야토토가 제자리를 찾은 거잖아요. 5개월 넘게 고생해서 만든 우리 아가들이잖아요.” 디자인 거버넌스에서 학대 피해 아동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개발한 ‘호야토토’는 상처 난 마음을 ‘호오’ 불어준다는 의미를 담은 토끼 캐릭터다. 입 모양도 동그랗게 디자인했다. 놀이 키트 속에는 퍼즐, 색연필 세트, 스티커, 팔찌 등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에게 따로 설명하지 않고 놀이 키트만 줘도 혼자서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쉬운 것으로만 구성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아이를 안아주는 그림으로 퍼즐을 계획했다가 엄마한테 학대받은 아이에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에 호야토토 캐릭터가 아이를 안는 그림으로 바꿨다. 구멍이 송송 뚫린 팔찌는 신발 브랜드 크록스의 지비츠처럼 다양한 캐릭터 액세서리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호야토토는 올해부터 송파경찰서와 성폭력·가정폭력 심리치료 지원 기구인 서울해바라기센터를 찾는 아이들과 만나게 된다. 권록 송파경찰서 여성청소년계장은 “기존에 조사실로 쓰던 공간이었는데, 학대 피해 아동뿐 아니라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맡길 곳이 없어 데려오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공간이 될 것 같다. 서울시의 취지가 워낙 좋아 선뜻 응하게 됐다. 다른 경찰서도 공간만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학대예방경찰관(APO)이 아이를 만나러 갈 때나 아이가 경찰서나 해바라기센터로 이동했을 때 애착인형과 놀이 키트를 제공해 아이가 가는 모든 과정에 동행할 수 있게 했다. 황상미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주무관은 “애착인형을 아이에게 줬다가 뺏는 게 더 상실감을 줄 수 있어 만나는 순간부터 집에 갈 때까지 계속 안고 있을 수 있게 선물로 줄 것”이라며 “우선 서울시 예산으로 애착인형과 놀이 키트 200개씩 만들었는데, 앞으로는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과 연계해 확산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씨는 디자인 거버넌스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하면서도 1년 뒤 경찰서 안에 이런 공간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해 5월 말에 저까지 12명의 시민이 모였는데, 상담 교사부터 교구업체 사장님까지 직업과 연령도 다양했어요. 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줄 거라고 살짝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경찰서까지 바꿀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팀원들은 매주 한두 차례 모여 주제별 리서치, 현장 조사, 아이디어 회의, 디자인 개발 등 문제를 다각도로 진단하고 아이디어를 냈다. 해바라기센터는 물론 경찰서와 지구대 등 아동학대 신고를 하면 아이가 가게 되는 곳을 찾아다녔다. “한번은 팀원들과 여정도를 만들었어요. 처음 사건이 일어난 뒤 아이의 동선을 다 같이 의논하면서 그려나갔는데, 문득 ‘별것 아닌 제 생각이 이분들과 함께하면서 뭔가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에 큰 의미로 다가왔어요.” 거기에 이해관계자와 전문가들의 자문이 더해졌고, 전문 디자이너와 관계 부서의 협업으로 최종 솔루션이 완성됐다. 지난해 12월21일 시청에서 디자인 거버넌스 한 해 결과물을 소개하는 ‘디자인 톡톡쇼’가 열렸다. 시민들의 현장 투표에서 호야토토가 2018년 5개 사업 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지난 2일 오후 송파경찰서에 새로 생긴 ‘학대 피해 아동을 위한 공간’에서 미술치료사 오희정씨가 서울시 ‘디자인 거버넌스’에서 개발한 호야토토 애착인형, 쿠션, 놀이 키트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 경험을 소셜미디어에 올리자 서울시의 ‘디자인 거버넌스’ 사업에 제안해보라는 댓글이 달렸다. 디자인 거버넌스는 서울시에 아이디어를 내면 시민이 투표해 선정한 뒤 시민, 전문가, 디자이너, 기업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해 디자인으로 해결하는 사업이다. 사업을 제안한 지 1년이 지난 2일 오후 오씨는 서울시 관계자들과 함께 송파경찰서를 찾았다. 여성청소년과 사무실 한쪽에 있는 문을 열자 작고 아담한 공간이 나타났다. 파스텔톤 색감의 벽에는 귀여운 만화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차갑고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경찰서에 이런 공간이 생기다니!”라며 다들 감격했다. 오씨는 가져온 인형과 쿠션, 놀이 키트 등을 작은 의자와 책상 위에 놓으며 “어떡해! 너무 귀여워!”를 연발했다. “드디어 호야토토가 제자리를 찾은 거잖아요. 5개월 넘게 고생해서 만든 우리 아가들이잖아요.” 디자인 거버넌스에서 학대 피해 아동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개발한 ‘호야토토’는 상처 난 마음을 ‘호오’ 불어준다는 의미를 담은 토끼 캐릭터다. 입 모양도 동그랗게 디자인했다. 놀이 키트 속에는 퍼즐, 색연필 세트, 스티커, 팔찌 등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에게 따로 설명하지 않고 놀이 키트만 줘도 혼자서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쉬운 것으로만 구성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아이를 안아주는 그림으로 퍼즐을 계획했다가 엄마한테 학대받은 아이에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에 호야토토 캐릭터가 아이를 안는 그림으로 바꿨다. 구멍이 송송 뚫린 팔찌는 신발 브랜드 크록스의 지비츠처럼 다양한 캐릭터 액세서리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호야토토는 올해부터 송파경찰서와 성폭력·가정폭력 심리치료 지원 기구인 서울해바라기센터를 찾는 아이들과 만나게 된다. 권록 송파경찰서 여성청소년계장은 “기존에 조사실로 쓰던 공간이었는데, 학대 피해 아동뿐 아니라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맡길 곳이 없어 데려오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공간이 될 것 같다. 서울시의 취지가 워낙 좋아 선뜻 응하게 됐다. 다른 경찰서도 공간만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학대예방경찰관(APO)이 아이를 만나러 갈 때나 아이가 경찰서나 해바라기센터로 이동했을 때 애착인형과 놀이 키트를 제공해 아이가 가는 모든 과정에 동행할 수 있게 했다. 황상미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주무관은 “애착인형을 아이에게 줬다가 뺏는 게 더 상실감을 줄 수 있어 만나는 순간부터 집에 갈 때까지 계속 안고 있을 수 있게 선물로 줄 것”이라며 “우선 서울시 예산으로 애착인형과 놀이 키트 200개씩 만들었는데, 앞으로는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과 연계해 확산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씨는 디자인 거버넌스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하면서도 1년 뒤 경찰서 안에 이런 공간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해 5월 말에 저까지 12명의 시민이 모였는데, 상담 교사부터 교구업체 사장님까지 직업과 연령도 다양했어요. 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줄 거라고 살짝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경찰서까지 바꿀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팀원들은 매주 한두 차례 모여 주제별 리서치, 현장 조사, 아이디어 회의, 디자인 개발 등 문제를 다각도로 진단하고 아이디어를 냈다. 해바라기센터는 물론 경찰서와 지구대 등 아동학대 신고를 하면 아이가 가게 되는 곳을 찾아다녔다. “한번은 팀원들과 여정도를 만들었어요. 처음 사건이 일어난 뒤 아이의 동선을 다 같이 의논하면서 그려나갔는데, 문득 ‘별것 아닌 제 생각이 이분들과 함께하면서 뭔가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에 큰 의미로 다가왔어요.” 거기에 이해관계자와 전문가들의 자문이 더해졌고, 전문 디자이너와 관계 부서의 협업으로 최종 솔루션이 완성됐다. 지난해 12월21일 시청에서 디자인 거버넌스 한 해 결과물을 소개하는 ‘디자인 톡톡쇼’가 열렸다. 시민들의 현장 투표에서 호야토토가 2018년 5개 사업 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